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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월 moon May 07. 2024

지금, 여기

#시간이가져다주는것들#생각보다,다정한세상

아빠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 시작한 무렵부터 약 7,8년이 지난 후 기적처럼 금주에 들어갔다.

그렇게 되기까지 너다섯번의 병원과 요양원 입퇴원을 반복했다.

피를 토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을 반복하고서야 아빠는 스스로 요양원을 향했고 또다시 그것을 두어 번 더 반복한 후에 "금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지옥... 같던 아빠의 알코올중독.

엄마와 남동생에게도 그랬겠지.

그 지옥에서 함께 살 수 없어 결국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된 우리 가족.


아빠가 금주에 들어갔지만, 한동안은 믿을 수 없었다.

아빠를 만날 때면 눈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았다. (술에 취한 아빠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표정이 있다.)


생신이나 어버이날에는 용돈보다 선물을 드렸다.

아빠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현금을 드리는 것이 조금 불안하다.

알코올중독자에게 현금은 술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아빠가 알코올중독 치료를 시작할 때 알게 된 사실 중 내가 절망한 것 한 가지는, 알코올중독자에게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알코올중독을 하나의 "병"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때는 앞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지금은 또다시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적이라고 했다.

아빠가 머물던 요양원에 계시던 분들도.

함께 기도해 주었던 나의 사람들도.


그 기적을 나는 천천히 깨달아갔다.

아빠가 금주에 들어갔지만, 그것과는 별개인 듯 엄마와 아빠는 이혼하셨고 엄마는 나를 떠났다.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빠는 천천히 아빠의 일상을 살아갔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갔다.





운동경기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추가시간이 더해진 기분이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추가시간 동안 나는 나의 마음을 다독이며 아빠와 딸, 부녀관계를 다시 쌓는 중이다.

때로는 추가시간이 내게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에게만 페널티가 있는 건가 하는 억울함이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아빠를 만났을 때다.


"하루하루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아."


아빠가 말했다.

마음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슬픔이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동시에 아빠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내게 무거운 돌을 가득 안고 오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은.

일 년에 두세 번은 아빠가 다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 꿈을 꾼 날은 아침을 시작하기가 몹시 힘에 겹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추가시간이 버겁기만 하던 때에서 역전 골이 터지는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한 것이 몇 년 전이다.


겨울이 오기 전, 아빠에게 괜찮은 구스 외투를 하나 사드리고 싶었다.

겨울 옷은 가난을 더욱 눈에 보이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남편과 나는 아빠를 모시고 아울렛으로 갔다.

우리가 잡아 놓은 예산과 그 가격대에 맞는 브랜드로 먼저 향했다.

어쩐 일인지 아빠가 옷을 입어보지도 않는다.


(딸과 사위를 생각해서 미안한 부모 마음을 예상하면 오산이다.)


아빠가 향한 곳은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고가 브랜드였다.

아빠가 브랜드를 알리가 없는데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빠가 고른 옷은 가격이 세 자릿수!!!!

아빠도 우리 부부도 놀라서 그 자리에서 내려놓았다.

마침 그 브랜드가 50프로 세일에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정말 아빠의 선택은 남편과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아빠는 모든 컬러의 옷을 입어보셨다. (나원참~ 하하하하)


그리고 결국 그 브랜드에서 옷을 고르셨다.

돌아오는 길에 알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찼다.

남편과 아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그동안 아빠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혼자 살게 된 후 아빠의 옷장은 언제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아빠의 옷차림은 깔끔했다.

그렇게 섬세하게 정리를 잘하는 남자였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아빠에게 고가의 옷을 사드린 것은 기대 이상으로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빠의 딸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마웠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 평범함을 느끼게 해 주어서 감사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빠와의 지나온 순간들 중 내게 따뜻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것이 언제나 아빠는 취해 있었고, 나는 눈치를 보고 무서워하고 불안해했으니, 따뜻한 추억은 내게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빠에게 겨울 외투를 사드린 그날은 두고두고 따뜻함으로 남아있다.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길이 무거운 책임감이 아닌 기쁘고 유쾌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생각보다 세상은 내게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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