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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월 moon May 14. 2024

어쩌면 생존자; 생각보다, 다정한세상

#브런치스토리연재효과인가 #다시알코올중독자 #다시마주한수치심 #또다시

브런치에 10회에 걸쳐서 아빠의 알코올중독 이야기를 기록했다.

지나갔지만, 내 안에서는 쉽게 지나가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과거를 지나가게 하는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렵다.

지나간 것을 정말 지나가도록 10번에 걸쳐 연재해 보기로 하고 매주 하나씩 풀어서 기록했다.

아빠의 알코올 중독 치료기간은 내게 지옥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을 보게 했다.

내게 주어졌던 가정이라는 세상은 어둡고 차가웠는데, 그 가정을 빠져나와보니 가정 밖의 세상은 오히려 다정했다.


때때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을 나의 전부로 보고 낙인찍듯 "네가 그렇게 자라서 너에게 그런 약점이 있는 거야."라는 어쩌면 옳은 소리로 다시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그때의 나의 삶을 함께해 주었다.

그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따스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까지의 인생과 그 이후 알코올 중독자가 금주의 시간을 보내기까지 나는 나 스스로를 '생존자'라고 여기며 살았다.


'살았구나.'

'살아냈구나.'


지독하게 치열하기만 했던 내 삶은 그래서 누구도 부러워할 수 없었고, 감히 경쟁할 수도 없었다.

부러워할라치면 온 세상이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경쟁은 상대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 평범한 일상에 조차 끼어들 수 없어서 나 스스로를 '겨우 살아낸 생존자'라고 여기는 것이 나에 대한 가장 후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더 많이 세상이 따스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니, 나는 정말 다행이라 여겼다.


알코올 중독을 포함해서 모든 중독은 완치가 없음에도, 한편으로 나는 아빠가 다시 술을 먹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했나 보다.

지난주 글만 해도 그렇다. 다시 읽어보니, 아빠의 치료기간이 마치 다 끝난 것처럼 기록했다. 정말 그렇게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지난주,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가족과 함께 2년 만이었다.

날씨가 다한 여행이었다.


좋은 것들을 실컷 보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나니 한동안은 일상을 잘 살아낼 수 있겠다 싶었다.


다녀온 후 주말에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면서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시부모님과 먼저 통화를 하고, 친정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쩐 일로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아빠에게 답이 없었다.

불안해졌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아빠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는 핸드폰을 잃어버리셨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을 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던 중에, 아빠와 통화가 되었다.


"여보세요?"


"...."


"아빠! 아빠!"


"... 어, 왜"


"아빠, 어디야?"


".... 집이지 어디야!"



목소리도 발음도 이상하다.

취기가 오른 목소리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아빠의 술기운.



"아빠, 술 취했어?"


"무슨 소리야! 안 마셨어!!!"



아니다. 아니었다.

큰 목소리와 부정확한 발음은 아빠의 취한 상태를 그대로 느껴지게 했다.

화가 났고, 절망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남편과 함께 아빠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일주일은 족히 지난 것 같은 쾌쾌한 냄새와 이리저리 온통 지저분한 살림가지들.

취중에 급하게 설거지를 했는지 고추장이 그대로 그릇에 묻어서 지저분하다.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 벗어서 두어 켤레가 방바닥에 굴러다닌다.


금주기간에 온전하게 삶을 정돈하고 꾸려가던 아빠는 없었다.

냉장고는 온통 뚜껑도 열린 채로 음식 재료들이 굴러다녔다.

먹다 남은 반찬도 그대로.

라면 부스러기가 가스레인지와 그 바닥에 가득했다.


화가 났다.

아빠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한테 정말 배신감 들어.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빠 사위랑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빠도 지지 않고 고함을 친다.

아빠의 취한 모습을 처음 본 남편은 옆에서 움찔 놀랐다.

그래도 남편의 한두 마디에 아빠는 수그러들고 그 말을 듣는다.

사위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지 부끄럽고 민망함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화가 나고, 슬픈 마음이 며칠 째다.

내가 무엇을 근거로 그토록 확신에 찼었나 싶다. 나의 오만함이었나,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나.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빠가 다시 술을 드시게 되는 일은 내 삶에 일어날 일 중 가장 최악의 일이라 여겼는데, 막상 일어나니 그만큼 최악은 아니기도 하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옥 같던 20대와는 달리 지금은 나의 가정과 나의 가족이 내게 따뜻한 봄기운이 되어주기에 그렇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 있기에 그렇다.


불안하지만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을 살고 있다.

일상에 깃들여 있는 회복의 힘을 의지하고 싶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지금의 일을 그저 받아들이고, 조금 흔들려도 일상을 버텨내야지.

글을 써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감정 속에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슬픔과 불안함을 감출 수 없어서 쓰는 족족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의 거친 마음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내야지.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기분인데, 바람이 지나가도록 흔들리겠지.

이 바람이 지나면 또 어떤 삶으로 살아가게 될까.

조금이라도 깊어지고,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라도 넓어져야 덜 억울할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저런 생각도 사치스럽다.


들쑥날쑥한 감정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다 보면, 또다시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을 마주하게 될까. 바라본다.


지금, 여기.

지난주와는 달리 아빠의 16년 남짓의 금주기간이 끝났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을 어렴풋하게 나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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