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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월 moon Apr 16. 2024

나 여기 있어요

#내면아이#토리헤이든#생각보다,다정한세상

토리헤이든의 책을 만난 건, 대학 시절이다.

"나 여기 있어요"

우연히 만난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유괴, 마약, 성범죄, 폭력, 알코올중독 등에 노출된 아이들의 이야기다.

부모 혹은 보호자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애정을 비롯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질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당한 아이들의 이야기.

기껏해야 5,6살 혹은 7살 정도의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애정보다 빨리 폭력과 범죄에 노출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몸과 정신은 심각하게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아이들을 돌보는 특수교사인 토리헤이든은 그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을 기록했다.


몇 년 후에 그녀가 쓴 책을 모두 찾아서 다시 읽었다. "한 아이 1, 2" "예쁜 아이"
어떤 날에는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화장실 갈 때만 일어나고 7,8시간 동안 책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토리와 같이 선생님이 되기도 했고, 그녀가 돌보는 아이가 되기도 했다.

십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한 신뢰를 쌓기도 전에 살아남기 힘든 참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 아이들의 삶은 '생존'에 가깝다.


봄에 꽃이 피어나는 데에도 따뜻한 온도와 적당한 바람, 비, 땅의 영양분이 필요한 법인데, 이 어린 생명들은 꽃을 피우기 훨씬 전, 싹이 나기도 전에 혹독한 추위와 온통 돌로 가득한 땅, 혹은 물 한 방울 허락되지 않은 사막에 뿌려진 씨앗 같았다.


그녀의 책들을 읽으면서 상담심리 대학원을 준비했다.

나 스스로는 찾을 수 없던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저 답답함과 목마름으로 살고 있던 나를 위한 공부였다.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존재와 삶을 끌어안고 사는 것은 무척이나 고된 노동 같았다.


책 속에서 만난 아이들과 상황은 나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안의 아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이는 수년 동안 내 삶의 많은 감정을 드러냈다.

때로는 폭풍같이, 때로는 사막 바람같이, 때로는 장마철 비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나타났고 종종 나는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해마다 특정한 시기가 되면 우울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폭풍 같은 나의 시간을 지나는 수년의 동안 몇 번의 상담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나는 상담자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지금 선생님의 상황이 편안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 그 감정들도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 선생님의 생활이 문제가 많고, 해결해야 할 것이 눈앞에 있으면 이렇게 과거의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는 없어요."


그때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살고 있는 내 삶은,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과는 다르게 내게 아주 '다정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돌아보니 언제나 나에게 오케이를 외쳐주는 따뜻한 지지자인 남편이 있었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두 아들이 있었다.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수다 떨고 싶을 때 전화할 수 있는 두 세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고, 내가 원할 때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영양분도 적당히 있고, 바람도 어느 정도 불고 해도 비치는 다정한 세상이었다.


상담을 공부할 때 "Here and Now"를 비중 있게 공부한 시간이 있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은 언제나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과거에서 떠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그저 주어진 공부를 하나씩 해 나가고, 삶의 마지막을 내가 결정하지 않고 내 안에 불어오는 바람과 폭풍을 그저 마주하면서 살아갔는데 어느 날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토리 선생님과 한 아이의 대화였다.


"저는 언제나 과거에 있어요. 어떻게 하면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죠?"


"그냥 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그 시간을 흘려보내렴."


아이가 던진 질문은 내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었고, 토리 선생님의 대답은 내 삶에 대답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지나온 시간을 흘려보내는 중이고, 앞으로 또 무수히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겠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지나온 나의 세상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다정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흘려보낼 시간 속에 더 많은 다정한 세상을 발견해 나갈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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