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망고와 팍세(2)

라오스 여행기

by 밤 비행이 좋아


(... 앞 글에 이어서)



아침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셔야 하는 나 같은 커피 중독자에게 팍송(참파삭 지역)은 천국 같은 곳이다. 커피 생산 신흥국으로 떠오르는 라오스의 커피 원두 생산량의 90%를 책임지고 있는 곳이 파로 참파삭의 팍송이기 때문이다. 생산되는 원두의 대부분이 인스턴트커피에 사용되는 로부스타(Robusta)지만 몇몇 농장에서는 고급 원두로 분류되는 아라비카와 루왁을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카페도 운영 중이었다. 카페라니! 라오스 시골 한 구석에 카페가 밀집해 있다니! 산 중턱에 위치한 농장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직접 생산한 원두를 볶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가 수십 개나 된단다. 까도 까도 새로운 매력이 나오는 곳이다. 이곳은. 이렇게 된 이상 입술이 빨갛든 간지럽든 간에 커피를 마셔야 했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에 비해 라오스 자국민의 커피 소비량은 현저히 낮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단다. 따라서 호텔 조식에도 커피는 없었다.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커피 한 잔 하지 못한 나는 커피가 절실했다. 심지어 커피를 마시면 알레르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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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팍송랜드의 커피밭에 도착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푸른 커피 밭은 뒷전이고 커피 주문하기 바빴다. 메뉴는 3가지였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그리고 라떼. 신기하게도 아이스가 있더라. 이웃나라 베트남 커피가 쓴맛이라면 라오스의 커피는 신맛이 느껴졌다. 베트남에서 생산된 원두가 새까맣다면 라오스의 원두는 갈색 빛을 띠기 때문일까? 설탕이나 시럽 없이 마시기 힘든 베트남 커피에 비해 라오스의 커피는 한국에서 마시는 커피와 맛이 흡사했다. 커피나무가 펼쳐진 하이팍송랜드는 보성 녹차밭을 연상케 했는데 이미 원두 수확이 끝난 시기라 열매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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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팍송랜드는 일대에서 가장 넓은 커피농장인데 주변으로 작은 농장들이 분포해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고급 커피로 유명한 Lak40으로 이다. 이곳은 농장보다는 카페를 주로 운영하고 있는데 생긴 지 무려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커피 수요가 낮은 라오스에서 말이다. 10년 전엔 누가 커피를 마시러 이곳까지 찾아왔을지 궁금해졌다. 10년 동안 카페를 운영해온 어머니의 사업을 물려받아 지금은 아들이 메인 바리스타로 활동하며 활발하게 SNS 운영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객들에게 Lak40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는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 늦은 오후 커피를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막 내린 핸드드립은 향부터 맛까지 완벽했다. 흔히 신선한 원두에서 느껴진다는 신맛과 감칠맛이 모두 느껴졌다. 사방이 뚫려 오두막 같은 Lak40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을 연상시켰는데 길을 걷다 들러 커피 한잔으로 휴식을 취하고 떠나는 휴식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근처에 살았다면 쿠폰제 도입을 제안하며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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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삭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소수민족 마을 방문이었다. 말이 소수민족 마을이지 목조 가옥 몇 채가 모여 있는 빈민촌이다. 예전에는 공책이나 연필 등 공부할 때 필요한 학용품을 나눠주곤 했다는데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이제는 과자, 사탕 등의 군것질 거리를 나눠준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반짝반짝 빛나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달려 나왔다.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어린아이들과 형편이 안돼 초등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 진흙이 벌겋게 드러난 땅을 맨발로 뛰어다녔다. 낯선 방문객을 맞이하려 몰려든 아이들은 물론 집집마다 깡 마른 닭들과 개까지 뛰쳐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두려움이나 경계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과자 한 봉지에도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자 문득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건지, 뭘 타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을지, 만약 알게 된다면 부러워할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할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갈 아이들을 보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건지, 잘못된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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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세, 팍송은 순 날것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자본주의에 잡아 먹히지 않은 대자연, 경쟁에 시달리지 않는 순수한 아이들. 철없던 사춘기 소녀 시절 해외여행 척척 가거나 명품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애들을 부러워했었다. 내가 대학생 때 한국사회는 금수저 논란으로 시끄러웠고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른 건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출발선이 다르니 그만큼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수많은 강의와 자기 계발서가 역설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특히 공적개발원조(ODA) 수업을 들을 때면 모든 아이들이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개발도상국을 강제로라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베네수엘라 빈민촌에서 피어나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LA 필하모닉의 구스타보 두다멜 같은 사람을 보면서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계몽'시킨 아주 훌륭한 예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동조하고 있는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라는 말로 포장된 한 개인 혹은 사회의 기준과 논리로 작은 원 안에서 행복한 이를 억지로 끌어내어 다른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 성공한 사람이 되고자 언제나 조급해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길이 만족스러웠는지 나는 행복했는지 여전히 확신 없이 어지러운 나의 마음이 바로 그 증거다.


팍세는 덜 익은 망고 같은 곳이다. 달콤하진 않지만 그 맛을 눈치챈 사람에겐 매력적인 곳.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활짝 피어날 가능성이 무한한 곳이지만 서둘러 그 껍질을 까버리면 탈이 날 수도 있는 곳. 왓푸 사원은 관광객으로 가득하고 그 뒤에는 쓰레기가 남고, 커피 농장 근처에는 잡상인의 좌판대가 들어서고 흥정으로 시끄러워지겠지.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던 곳엔 높은 건물이 들어오고 도로 위엔 차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뭐든지 그대로 뒀을 때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익어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는 요즘 나는 조금 쉬어가려고 한다. 참파삭에서 마주한 대자연이 내게 위안을 건넨 것처럼 여전히 조급해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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