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즐겨보던 만화 <원피스>에는 주옥같은 명대사가 한가득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다) 원피스는 해적왕이 되는 게 인생 목표인 주인공 루피와 동료들이 항해하며 겪는 온갖 도전과 역경 그리고 끈끈한 동료애를 담고 있다. 1대 해적왕 골드D로저가 숨겨 놓은 ‘원피스’라는 보물을 찾으면 이야기가 끝난다는 설정이다. 내가 중학교 때 이 만화는 유독 인기였는데 우리 반 반장은 틈만 나면 '너 내 동료가 돼라'를 외쳤으며 내 친구는 자타공인 원피스 덕후로 집에 전집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뭐, 결론적으로 루피를 비롯한 해적들은 20년째 원피스를 찾아 항해 중이다. (첫 단행본 출시일: 1999년 1월) 뜬금없이 원피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랜만에 옛 회사 동료를 만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그대로였다. 작년 말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을 때 퇴사 후 한 달 정도 유럽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와 만난 모든 이들은 퇴사했거나 퇴사를 계획 중이다.) 올해 1월 우한에서 터진 코로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며 무사히 잘 다녀왔는지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비행기가 중국을 경유하는 편이었단다. 결국 안전을 위해 생돈 날리며 티켓을 취소하고 어찌어찌 무사히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웠던 모양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발자국을 찍은 도시들을 나열하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에게도 포르투갈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열정적으로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가방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제작한 엽서였다. 생각해보니 회사 다닐 때도 사진을 잘 찍는다고 했던 것 같다. 리스본과 포르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잠들어 있는 나의 리스본행 비행기 티켓이 생각났다. 6월 1일 출국 예정인 그 티켓을 아직까지도 취소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포르투의 바다 사진을 보고 감탄하는 나에게 그녀는 다시 한번 내가 리스본을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서순라길 <타이거타이거>
나는 인간관계가 어렵다. 특히 장시간 동안 대화에 노출되는 게 부담스럽다. 다양한 종류의 모임, 일대일 혹은 다수와의 만남은 나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 꽤나 나서는 걸 좋아하고 그만큼 주목받는 걸 즐긴다고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다. 스스로를 포장했던 건지 시간이 흘러 성격이 바뀐 건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사교계가 모든 걸 주름잡던 19세기에 태어났으면 혼자 외롭게 죽어갔을게 분명하다. 마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메리 베넷 같은 타입이다. 메리 베넷은 베넷가의 셋째 딸인데 뭐하나 뛰어난 게 없어 열심히 공부하며 소양을 쌓지만 사교 모임에서 겉도는 별로 실속없는 캐릭터다.
심각하게 낯을 가린다거나 대화에 참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니지만 일과 관련한 미팅을 제외한 모든 사교적인 대화는 1시간이 한계다. 1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다. 내 안의 무언가를 쉼 없이 쏟아내고 상대방의 그것을 다시 받아내고 공감하고 동조하고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이 안 가는 감정, 의견, 주장이 탁구공처럼 탁탁 튀며 끊임없이 오가는 시간을 찜찜하게 마무리 짓고 집에 돌아오면 진이 빠진다. 때론 상대방의 의견에 열렬하게 맞장구를 치는 나의 모습이 진심인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상대가 보고는 싶지만 만나면 힘들고 고생스럽게 집까지 돌아와야 하고... 그래서 가끔 약속 시간을 어정쩡하게 잡는 편법을 쓴다. 3시쯤 만나면 커피와 디저트만 먹고 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서순라길 돌담길
유럽여행, 나의 전 직장, 우리의 전전 직장, 현재의 코로나 등 다양한 주제가 오가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적한 서순라길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돌았고 카페에서 티라미수도 먹었으며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를 즐기자며 루프탑까지 올라간 참이었다. 그동안 한계점이 높아진 건 지 갑자기 매콤 달콤한 떡볶이가 당겼다.
근처에 맛있는 떡볶이 집으로 안내하겠다며 호기롭게 앞장섰는데 그곳은 안타깝게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순간 힘이 쫙 빠지며 피로가 몰려왔다. 떡볶이라는 거짓 식욕에 눌려있던 것인지 갑자기 피로와 부담감이 살아나며 집에 가고 싶어 졌다. 하지만 떡볶이 맛집으로 가자던 나를 따라온 그녀에 대한 예의와 나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근처에 분식집 하나 더 있는데 가볼래요?’
떡볶이를 파는 곳을 찾아 걷다 보니 충무로였다. 종묘에서 을지로를 거쳐 충무로까지 걸어가며 만난 모든 분식가게는 휴무였다. 심지어 와플대학까지 문을 닫은 충무로의 일요일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영업 전 잠자는 식당거리 같았다. 점점 오기가 생긴 우리 둘은 오늘 반드시 떡볶이를 먹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았다.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 눈 앞에 김가네가 보였다.
다들 김가네가 김밥가게로 알고 있겠지만 김가네의 대표 메뉴는 라볶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가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며 호들갑을 떨던 우린 어쩔 수 없이 김가네에 들어갔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뻤다. 정말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냥 떡볶이가 먹고 싶다거나, 자존심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배가 꼬르륵거렸다.
‘나는 중학생 때 마지막으로 가본 것 같은데요?’
- 저도 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와, 메뉴판도 있어요. 나 때는 종이에 체크하는 거였는데’
- 야채튀김도 있네, 진짜 오랜만이다
라볶이에 새우튀김, 야채튀김을 시켰다. 온갖 채소를 채 썰어 튀김가루를 묻혀 튀긴 야채튀김은 어린 시절 내 최애 튀김이었다. 요즘엔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김가네에서 추억의 튀김을 만나게 될 줄이야. 역시 라볶이 맛집다웠다. 어묵이 없는 게 슬펐지만 만두가 들어있으니 괜찮아. 먹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선택에 감탄했다. 떡볶이 앞에 대동단결이라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죽이 잘 맞는 사람 앞에서 피로고 뭐고 사라져 버렸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나 혹은 상대방의 진심이 없어서 그럴 테다. 따로 있어도 어려운 인간과 관계를 붙여 놨으니 그에 상응하는 진심이 필요하다. 루피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동료가 돼라며 들이대는 최강 인싸지만 나는 친구 모집 공고를 이마에 붙이고 다닐만큼 붙임성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타인과 장시간 대화에 노출되는 걸 극히 꺼려하는 메리 베넷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진심을 다해 마음속으로 무언의 구애를 한다. "제발 저의 동료가 되어 주세요" 그리고 한번 동료가 된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다행히 본인이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직접 인화해 선물로 챙겨 오는 따뜻한 사람을 붙들게 되었다. 덕분에 1시간의 위기를 넘겨 반나절을 함께했다. 그러고 보니 서울 여행이었다. 종로에서 만나 창덕궁을 보고 종각까지 걸어가 종묘도 보고 세운상가에 들렀다가 을지로 조명거리를 걸었고 남산골한옥마을이 있는 충무로까지 가서 라볶이를 먹었다. 김가네 라볶이는 그 주에 먹은 음식 중 제일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