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경험 있을 텐데,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의 아름다운 광경과 조우한다든지 혹은 생각 없이 한입 베어 문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든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지만 결국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되는 선물 같은 순간들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멍하니 누워있기보다 밖으로 나가 산책로라도 달려야 하고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입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오징어를 씹어 삼켜야 하는 부류다. 굳이 실용성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텅 빈 시간과 공간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요가 수련을 하고 커피를 내려 라테 아트를 그리고 책을 쓰고 필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떻게든 공백을 메꿔간다. 안 그래도 최근에 심심풀이로 한 온라인 심리테스트에서 성인 ADHD가 나와 심란한 마당에 또다시 손을 쓰고 머리를 쓸만한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공간’은 중요하다. 나에게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범위가 아니다. 공간은 나의 세계이자 나 자신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을 아지트가 내게는 대여섯 개쯤 된다. 글 쓰는 카페, 공부하는 카페, 책 읽는 벤치, 우울할 때 찾는 공연장, 외로울 때 걷는 숲길. 그곳에서 안정을 꾀한다. 지금은 오븐 돌아가는 소리가 더 큰 ‘글 쓰는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군데이다. 공연이라도 보러 가는 날에는 공연 볼 생각에 설렜고 전시회를 보러 갈 때면 기대감으로 평범한 하루가 반짝거렸다. 어떤 날은 셀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릴없이 예술의 전당에 가기도 했다. 언덕길 끝에 요새처럼 자리 잡은 그곳엔 공연장이 있고 미술관도 있고 카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총 집합이다. 고요와 평안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초구는 출, 퇴근 시간만 되면 긴 꼬리를 무는 빨간 불빛의 행렬이 끊이지 않아 서울 시내에서 가장 복잡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학교 2학년 때,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정체 모를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시기가 찾아왔다. 고대하던 긴 터널에 진입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고 싶었다. 한 여름, 7교시 수업을 빼먹고 무작정 예술의 전당 음악 분수대 앞에 앉아 펑펑 울었다. 아이들은 꺅꺅거리며 뛰어다니고 데이트 나온 커플은 꼭 붙어 산책 중이고 엄마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분수를 감상하는 공공장소에서 남들이 흘끗 대건 말건 엉엉 울어버렸다. 마음은 불안하게 울렁였고 이마가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쿡 찌르면 눈물이든 콧물이든 둘 중 하나가 터질 것 같았는데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나의 미래와 터널의 끝 뭐 이런 걸 전부 잊어버리려 했던 것 같다. 창피한 것도 모르고 눈물을 질질 짜다가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기숙사로 돌아갔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웠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그럴 시기였다. 울어야 풀리는 시기.
음악분수대는 내가 초등학생 때 생겼다. 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이는 분수대라니, 처음 봤을 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던 분수대가 이젠 한쪽 눈을 감고 봐도 다 들어온다. 나도 옛날에 신나서 그 앞을 뛰어다녔는데 지금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만 볼뿐이다. 기억조차 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면산과 갓을 쓴 오페라 하우스로 둘러싸인 그 공간이 참 좋았다. 대학시절 교양수업의 어느 교수님은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꼴 보기 싫은 건물이라고 폄하했지만 나는 갓 모양 지붕을 뒤집어쓴 오페라 하우스가 좋았다. 그 공간의 여유가 내 것이 된 것 마냥 나도 여유로워지곤 했다. 물론 요즘엔 우울하다고 서초구까지 가지 않는다. 좀 더 개인적이고 친밀한 ‘공간’을 발견했다. (너무 멀어 마음의 위안을 찾기도 전에 체력 부족으로 쓰러질 게 분명하다.)
아지트 중 하나였던 카페가 사라졌을 때 상실감이 밀려왔다. 카페였던 건물 창문에는 임대문의 연락처가 붙어 있었다. 웃긴 일이었다. 카페 주인도, 건물 주인도 아닌 주제에 슬퍼하다니. 아지트 옆 가게도, 맞은편도, 뒷골목도 다 카페였는데 나는 어디를 가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어버린 공간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외부에서 위안을 찾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카페의, 창가의, 공원의, 분수대 앞의 여유는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잠시 위안을 주는 외부 요소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안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내 안에서 내 공간을 찾아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이유다. 어찌 됐건 나는 아무거나 하면서 공간을 세우고 채워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요가 수련을 하면서 내 안의 공간을 발견하고 물리적인 결과 이상의 안정을 안겨준다. 공간을 구성하는 잔잔한 배경음악, 부드러운 햇빛, 옆 수련자의 적당한 온기를 내 안에서 찾는다. 눈물을 질질 짜는 대신 부지런히 팔다리를 움직여 수련할 때면 독립적인 내 안의 공간에서 들숨에 커지는 흉곽을 느끼고 나에게도 있을 지성을 추구하며 내가 만든 공간에게 위로를 받는다.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공간을 구축한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꽃과 열매를 피워나간다. 어떤 방법으로 뭘 하면서 만들어 나갈지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다. 심리테스트에서 곰돌이 푸에 버금가는 ADHD를 진단받은 나는 에스프레소를 내려 라테아트를 그리고 바를 잡고 다리를 찢으며 유난스럽게 공간을 채워나간다. 대학교 2학년 무렵 내가 느낀 불안과 두려움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공간의 부재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무거나’ 할거리를 부르는 내면의 소리였을 것이다.
우리는 유난히 짧은 봄꽃의 절정을 안타까워하지만 나무는 올해도 꽃을 피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가 목격한 건 겉으로 보이는 꽃잎뿐이지만 나무는 작년에도 꽃을 피웠고 새 잎사귀를 튀었고 영양분을 보충하며 겨우내 봉우리를 품어 다시 꽃을 피웠다. 나무의 존재는 해가 갈수록 커지고 단단해지며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나의 공간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