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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pr 10. 2021

망한 사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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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사례만 모아 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이런이런 일을 했는데요, 처참히 말아먹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실패했다는 사람은 없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어떻게든 성공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분명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쳐버린 일들이 있을 텐데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가 해보기로 했다. 


내 돈 주고 산 첫 카메라는 캐논 g7 mark2다. (나름) 비싼 돈 주고 산만큼 애지중지 했다. 사진의 묘한 매력을 알아갈 무렵 큰 마음먹고 구매했다. 찰나를 담은 시간의 복제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이었지만 몇 해전에 열린 <마리오 쟈코멜리> 사진전에서 단조로운 흑백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  빛과 어둠뿐인 사진에서 시를 읽었다면 거짓말처럼 들릴까? 사진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사진은 복제품이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놓쳐버리고 마는 0.0001초의 순간을 담은 기록이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었고 어깨가 아파도 가방 속에는 늘 카메라와 보조배터리가 들어있었다. 여행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고 장소의 추억이 몰려왔다. 그래서 엽서로 만들어봤다. 그것도 대량으로. 내 눈에 괜찮아 보이니 남의 눈에도 예뻐 보이겠거니 돈이 될 것 같았다. 현실적인 고민 없이 대량으로 엽서를 찍어냈는데 만들고 나니 판매처를 찾아야 했다. 

'요즘엔 플리마켓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엽서를 많이 판다더라' 

지인의 조언에 연남동 어떤 옷가게 옆 차고에 수수료를 내고 플리마켓에 참가했다. 별 특징 없는 기다란 책상 3개를 펼쳐 놓고 참가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물품을 판매하는 형식이었다. 아침 10시에 가서 오후 4시까지 단 한 장의 엽서도 판매하지 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잠깐 차고에 들어온다 해도 엽서에 이렇다 할 관심이 없었다. 보다 못한 옷가게 주인이 나와 호객행위를 하라고 조언했다. 도저히 '엽서 사세요'를 외칠 수 없었던 나는 끝까지 책상 너머에 책 읽는 척하며 앉아있었다.


내가 찍은 사진은 흔했다. 잠깐만 검색을 해봐도 인터넷에 비슷한 사진이 넘쳐났고 다시 보니 내 추억을 투영시켜 봤기 때문에 특별했을 뿐 남이 보기에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5cm도 안 되는 얇은 엽서가 박스 안에 쌓여있는데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요즘 유행이라는 소품 숍 입점을 공략하여 이제 막 오픈하는 대전의 한 소품 숍에 입점하게 되었다. 한 장 당 천오백 원으로 책정한 엽서는 한 달에 한 자릿수 판매를 기록했고 세금 떼고 입점 수수료 떼고 통장에 몇 천 원씩 들어오는 수준이다. 다행히 이때 대량으로 뽑아놓은 엽서를 책 출간 이후 기념품, 선물용 등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들고 있기만 해도 솔드아웃일 줄 알았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사실 실패의 원인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첫 플리마켓 도전 겸 엽서 판매는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밖에서 망했으니 안에서 성공을 일궈보자 싶었다. 노트북만 있으면 가능한 필사 작업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영어 필사는 개이적인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큰돈을 바란 건 아니지만 커피값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배정된 첫 번째 필사는 한국 뉴스였다. 아마 9시 뉴스 끝에 나오는 기상예보였을 거다. 

'겨울철 한강물이 꽁꽁 얼었고 전국적으로 영하 몇 도까지 떨어졌고 앞으로 몇 번 더 얼 것이며 밖에 내다 놓은 커피도 얼었고 걸어 다니기 힘들 지경이며......'

그다음은 짧은 영어 단문을 받아 적는 필사를 진행했다. 그다음엔 한국 예능 프로그램 필사였다. 그냥 들리는 대로 받아 적으면 되니 쉽게 돈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지정 프로그램에 가입하여 온갖 태그와 기호를 써가며 필사를 진행해야 했다. 시급은 괜찮았지만 내 시간이 괜찮지 않았다. 그냥 재미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잠깐 하다가 그만뒀다. 한 달 동안 필사해서 번 돈은 삼십만 원. 이마저도 페이팔(paypal)에 잠들어 있어 언제 내 손에 쥐어질지 모르겠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 탓에 올 초, 마음 맞는 후배와 아침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는 월간지를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 망친 일 되시겠다. 전전 회사에서 처음 만난 우리 둘은 사진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졌고 꽤 비슷한 취향을 향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퇴근 후 어느 날 저녁 감바스에 와인 한잔 하다가 일을 벌였다. 

'우리 같이 글을 써보자'

회의할 때마다 나오는 각종 아이템과 신선한 주제에 신이 났지만 정작 둘 다 생업에 허덕이느라 글은 비정기적으로 업로드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사례집 속에 들어와 있다. 어디 이뿐일까. 며칠 전 한 기업의  프리랜서 번역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서류에서 탈락했다. 다른 사례는 몰라도 이건 살짝 억울했다. 샘플 테스트를 보고 실력 때문에 떨어졌다면 내 실력에 의구심이라도 품었을 텐데 서류에서 떨어지니 애꿎은 소설책에 화풀이를 했다.


해보겠다고 큰소리 땅땅 치고 실패한 게 이것만은 아니다. 중간에 포기한 것도 여럿이다. 포기와 실패는 나쁜 게 아니다. 망하면 어떤가! 해보고 다른 길을 찾으면 그만이다. 원인을 분석하면 좋겠지만 게으른 탓에 망한 채로 보관 중이라는 게 문제다. 그래도 모든 사람이 늘 성공만 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좀 위안이 된다고 믿는다. 고약한 심보지만 나만 힘든 건 아니니 버틸 수 있다. 특히 언제나 하이에나처럼 일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프리랜서들에게 단박에 성공하는 천재는 없다는 현실을 공유하면 좀 더 기운을 얻고 열심히 도전하는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내 주변에는 초보도 경력자도 없어서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세상 모든 프리랜서들이 나의 비루한 망한 사례집을 보고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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