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삽질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날,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3월. 봄이다.
인간의 봄은 3월에 시작하지만 땅의 봄은 다르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10월부터 시작된 땅의 봄이 만인에게 공개되는 시기가 3월이다. 인간도 땅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는 달이다. 농촌에서는 3월에 뭘 할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농촌에선 농사를 짓는다. 땅을 갈고 솎아서 퇴비를 주고 씨앗을 심는다. 농사에는 다 정해진 때가 있어 그 시기와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일 년을 날려먹기 십상이다. 농사의 세계는 가혹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직장인이 9시까지 출근해 6시에 퇴근하듯 늘 정해진 업무가 아니라 매일, 매달 다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3월부터 봄 내내 뿌린 씨앗이 시간이 흘러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조금씩 변화하다가 수확의 결실을 맺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구슬땀 흘려 만들어낸 결과물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아름다운 일이다.
이곳에 내려왔을 때 농사는 내 선택지에 없었다. 귀촌이면 몰라도 귀농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농사는 1차 산업, 진작에 끝남, 농사는 농부만 짓는 것, 농부는 시골에 사는 사람'
철없던 시절 국사 교과서 속 고려시대 우경화와 조선시대 이앙법 등장은 내가 알던 농사의 전부였고 '농부'라는 직업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도시에 살면서 경험해 본 '농사'라곤 주말농장이 전부였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들 사이에서 주말농장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이는 아이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집 주변은 온통 파밭과 논의 콜라보였고 저녁이면 버스 두 대가 겨우 지나가는 도로 좌우에서 개구리가 떼로 울어대곤 했다. 하교할 때면 밭매고 논매는 어른들을 보며 나름 자연에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농사와 농부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흐물흐물한 거 보면 진짜 오며 가며 눈으로만 봤던 모양이다.
안계 살이 첫 주, 텃밭 만들기에 돌입했다. 텃밭 가꾸기지만 가꾸기보다 만들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마치 공사판에 투입된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절대 햇볕에 노출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중무장한 비장한 모습일 테니 누가 봐도 정성스레 가꾼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잔뜩 메마른 땅은 단단했다. 수분을 잃어 희멀건한 땅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설마 저 땅을 다 뒤집어엎어야 하는 건가....'
애써 떠오르는 기우를 무시한 채 농기구를 하나씩 설명해주는 이장님만 바라봤다. 농기구의 세계는 예상외로 스펙터클했다. 낫도 특허를 낸 제품이 있단다. 손잡이 부분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일일이 길이를 재지 않더라도 씨앗을 심는 구멍 간격을 조정할 수 있다. 뭉툭한 끝 부분을 땅에 쑥 집어넣어 구멍을 팔 수도 있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는 먼저 땅을 솎아줘야 한다. 전년도에 쓴 땅은 영양분이 부족하니 속에 묵혀둔 땅을 파서 섞은 후에 뭉쳐 있는 흙을 낫으로 조순 후 그 위에 퇴비를 뿌려야 하다. 우리 팀이 맡은 땅은 겨우 10평 남짓한 원룸 크기였는데 성인 3명이 매달려 반나절 넘게 땅을 뒤집어엎어 퇴비를 섞은 후에야 그나마 상추라도 심을 수 있는 땅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본격적인 시골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시골이라고 다 농사를 짓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공동체를 책임지는 주요 산업을 경험해 보지 않고 정착이네 마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은 교감한다니 농부가 되어 시간에 따른 교감을 직접 이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땅을 삽으로 파서 엎으면 다른 이가 낫과 모종삽으로 흙을 잘게 부수고 이랑/고랑의 형태를 갖춰 나갔다.
'뭐 1시간이면 뚝딱이지 않을까?'
'우리 감자용 두 개, 방울 토마토용 한 개 그리고 고추, 오이 뭐, 쌈채소 다 해서 이랑만 8개 정도 만들까?'
'바질도 심자. 생바질로 파스타 만들어 먹어도 맛있는데.'
요즘 내가 밀고 있는 콘셉트가 ‘물욕 없는 원희래’인데 다 틀렸다. 안계에서 절대 샐러드를 사 먹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쌈채소를 전부 심을 생각을 하니 그에 정비례하게 삽질 수가 올라갔다. 일단 역할을 분담하여 기계적으로 삽질과 낫질을 이어갔다. 처음엔 괜히 목장갑 아래 희미하게 느껴지는 흙의 촉감을 만져가며 정성스레 낫질을 했다. 하나 완성하고 나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땀방울이 맺혔다. 마스크 뒤, 얼굴은 엉망이 되어갔고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선글라스를 낀 눈은 점점 따가웠다. 아마 아침에 듬뿍 바른 선크림이 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랑을 2개쯤 만들고 나니 기계가 된 것처럼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흙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문득 <모던 타임스> 생각이 났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은 기계처럼 스패너를 돌린다. 완벽하게 계산된 컨베이어 벨트에 스패터를 데고 부품을 돌리고 뗐다가 다시 돌렸다가 뗐다가… 멍하니 영화 속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데 순서를 바꿔야 하는 때가 왔다. 삽을 맡았다.
한 삽 푹 넣어 무려 다섯 달 전부터 시작된 땅의 봄을 위로 퍼올리니 진하고 촉촉한 새 생명이 지구의 봄으로 올라왔다. 땅 아래가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고 돌아 스스로 영양분을 생성하고 재생한다는 사실은 교과서에서 익히 보았지만 신기할 따름이다. 무심히 지나가는 낮과 밤을 견뎌 땅의 봄은 10월부터 시작된다.
솎은 땅에선 흙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랑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면 저 깊숙이 있던 땅이 밖으로 나와 신이라도 난 건지 온갖 향을 힘차게 뿜어내는데 내 후각은 이를 신선하고 건강한 냄새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3월인데도 햇빛이 쨍 하니 내리쬤고 작업할 때는 몰랐는데 살랑바람도 불어와 눈 감고 있으면 아지랑이 흔들리듯 땅 냄새가 솔솔 흘러들어왔다. 새까만 아스팔트 깔릴 때 흔히 맡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땅이라 알고 살아왔던 도시에서 시간들, 도시의 땅은 새까맸다. 그 위에 흰색,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다가 옆 인도를 잡아먹어 다시 차가 다니는 길로 확장하고 연말이면 냄새 지독한 화학물질을 쏟아부어 더 까맣게 칠하곤 했다. 내가 아는 땅은 그게 전부였다. 귀엽게 소꿉장난 하는 수준이지만 진짜 땅을 맡았다. 내가 만든 고랑으로 물이 흐르고 이랑에 새싹이 나고 다시 내게 올 거라는 생각을 하니 짜릿했다. 아까 모던 타임스라고 했던 거 취소다.
p.s 이 글을 쓰고 세 달 가까이 지났을 때 감자가 생겼다. 아직 수확철이 아니겠지만 철없고 기다릴 줄 모르는 도시농부들이 아주 조심스레 밭을 파 본 결과,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아직 작은 알 감자는 참 귀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