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외식이 하고 싶었다. 저녁까지 작업을 이어가다가 오랜만에 운동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문득 외식한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작은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앉아 짭조름한 바깥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시켜 먹는 치킨은 이미 질린 지 오래였다. 시골 특성상 백반집이 대다수고 그마저도 7시 이전에 문을 닫는다. 외식이라곤 배달 가능한 치킨집이 전부인데 그날만큼은 닭가슴살을 발라먹고 싶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대로 차를 돌려 이웃 동네로 향했다. 말이 이웃 동네지 시 소재지다. 차 안에서 열심히 음식점을 검색했는데 전부 영업제한 시간과 라스트 오더 시간에 걸려 서둘러야 했다. 괜찮다는 파스타 전문점 한 곳을 정해 라스트 오더 직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앉자마자 주문하고 말없이 파스타와 피자만 흡입하다가 들어간 지 20분 만에 계산까지 하고 나왔다. 그리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절대 스타벅스 하나 때문에 안동시까지 달려간 거 아닙니다) 9시가 코앞이었으나 느긋하게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와 달콤한 케이크를 먹었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보이는 거라곤 가로등과 불 꺼진 가게의 간판들 뿐이었지만 터질 것 같은 배와 다르게 속은 뻥 뚫리는 듯했다.
나는 답답한 걸 못 견뎌한다. 숨 막히게 좁은 통로나 겨울철 세게 히터를 틀어 놓은 실내 공기라던가, 목욕탕의 수증기라던가. 사방에서 조여 오는 기분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시야가 차단되어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돈만 많았어도 직관할 때는 언제나 1열 중앙 자리를 고수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돈이 있어도 못 앉기는 하더만) 따라서 카페에에서도 입장한 순간 제일 먼저 창가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리 햇빛이 많이 들어오더라도 바깥세상과 연결된 창가 자리가 좋다. 어쩔 때는 내리쬐는 태양을 정수리로 받으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할 때도 있는데 삐질삐질 땀을 흘릴지라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전에는 서울 근교, 주로 남양주 팔당댐 쪽에 통창으로 크게 자리를 뺀 대형 카페들이 많아 숨이 막히고 답답할 땐 양평이나 문호리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곤 했다. 요즘엔 어디서나 크게 창문이 뚫린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창고를 개조한 창고형 카페 같은 경우에는 층고도 높고 창문도 많아서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공간 안의 공기를 나눠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숨이 조여오지 않는다. 창문은 중요하다. 건축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무조건 창문을 크게, 천장에도 창문을 뚫어놓을 테다. 회사를 다닐 때도 답답할 때면 옥상까지 걸어 올라가서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숨을 뱉어내곤 했었다. 온갖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시에서 시야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겨울 바다를 자주 찾았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강릉이었는데 평창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KTX까지 생겨 2시간도 안 걸려 드넓은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곁에 지평선을 두고 있다. 처음 지평선을 봤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가장 높은 건물, 넓은 평야가 하늘과 맞닿아 있는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수평선이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면, 물 위에 무언가를 지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수평선을 보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인간은 땅을 본인들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서 있을 수 있어 되는대로 짓고 쑤셔 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땅도 하늘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을 보자 끝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먼 옛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기 전 사람들은 바다의 끝이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다. 바닷물이 흘러내려 폭포를 이루고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은 폭포 아래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단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지평선을 향해 걷다 보면 진입불가, 통제 구역이 나오거나 산이 나오거나 바다가 나올 텐데 기분상으로 지평선의 끝도 전설 속의 수평선처럼 낭떠러지가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더 깊숙이 알고 싶지 않다. 그냥 보이는 것만 보고, 듣고, 믿고 싶다. 옥상도 스카이 라인도 없는 지금은 답답할 때면 잠깐 산책하듯 평야를 걷고 지평선을 감상하곤 한다. 덕분에 유명한 카페가 없어도, 층고도 높고 통창이 크게 뚫린 카페가 없어도 크게 숨을 쉴 수 있다.
문득 대학생 시절 제주도 뚜벅이 여행이 떠오른다. 공천포 바다 근처에 있던 카페 숑에 앉아 창 밖에서 넘실대는 공천포 바닷가의 파도를 보며 근원 없는 허무함을 날려버렸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이 연속 재생되었다.춥고 흐린 날이었다. 오전 내내 올레길을 걷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지친 다리를 풀어주고 근처에 밥을 먹으러 나온 길이었다.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 근처로 걷다가 카페를 발견했다. 길게 창문이 나 있는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살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카페 문을 열었고 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고요한 카페에 유독 음악소리가 컸다. 기다란 6인용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서 공천포 바다를 독식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성시경의 <두 사람>을 따라 부르면서 마음껏 우울에 취해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때 테이블에 방명록이 있었다. 제발 지금은 폐기되었기를 바라는 내용을 적었다. 물론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뭐라고 적었는지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심지어 실명으로 사인까지 했었다! 집을 그렸고 커다란 창문을 그려 넣었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제멋대로인 감정을 마음대로 적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졌다. 혹시나 싶어 카페 이름을 검색창에 쳐보니 아직도 그 자리에서 영업 중이더라. 주변에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두 사람> 카페는 그 자리에서 공천포 바다를 담고 있다.
누구나 선호하는 풍경이 있고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창가에 앉으면 웬일인지 생각이 더 잘 돌아간다. 생각하고 싶을 땐 반드시 종이와 펜을 챙긴다. ‘아, 지금 생각하고 싶은데?’ 좀처럼 머릿속에서 문장을 이어나가기 힘들어 늘 종이와 펜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통창이 시원하게 뚫린 카페에서 다음에 쓸 글의 주제인 ‘창문과 공간’에 대해 퍼뜩 떠올랐는데 그다음이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가방에 작은 다이어리와 샤프펜슬을 늘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곧바로 아이디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적어 놓지 않으면 휘발돼 버리는 것. 불안하다. 종이와 펜을 늘 지니고 다녀야 한다.
이상 종이, 창문, 커피가 어쩌다 내 기록의 3요소가 되었는지 간락햔 설명이었다. 내 시선 안에서 창문은 소실점이며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다. 단절된 답답함을 극도로 꺼리는 내게 창문은 중심이 된다. 따라서 창문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 요소들 - 신 맛 강한 커피와 종이 - 이 있다면 그날은 재미있어 보이는 기록을 이어가는 하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