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Aug 24. 2022

파기된 계약

you cannot sit with us



심장이 쿵 떨어졌다. 상체에 꼭 달라붙는 핑크색 셔츠를 입은 그레첸이 날 노려보며 이렇게 윽박질렀다.*

“넌 여기 앉을 수 없다니까!”

얼굴 가득 당혹감으로 물들었고 앙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나 모욕적이라 꽉 깨문 이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절망과 두려움인가! 예의로 가장했지만 사실은 신랄한 내용뿐인 메일에 적힌 내용은 말 그대로 “작가님은 이제 우리랑 못 앉겠다.”였다. 의뢰받은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비판과 받아들일 수 없는 문체, 부당한 요구로 가득한 메일을 한 번 더 읽어봤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트릭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상대방은 계약한 금액의 절반만 받고 지금까지 쓴 걸 넘기거나 아예 초창기 현장 인터뷰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굉장히 ‘후하게’ 쳐준 조건 사이사이 내 글이 별로니, 내가 포인트를 놓쳤다느니, 내가 이해력이 딸린다느니, 한마디로 ‘너는 별로’라는 내용만 가슴에 콕콕 박혔다. 


나는 계약 파기를 선택했다. 고작 얼마 받자고 용납할 수 없는 의견과 일방적인 통보를 수용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메일을 보냈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게 남은 건 사용하지 못하는 80쪽 분량의 원고지뿐이었다. 나는 그 흔한 계약금도 없이 일을 했다.

“그냥 안 하려고.”
“그럼 돈은?”
“치사하잖아! 어떻게 원고를 반만 받고 팔아. 그래도 내 글인데, 가져가서 마음대로 하겠대잖아. 그냥 다 휴지통에 버릴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자기 의심이 모든 장기를 파고들었다. 

‘진짜 내가 별로인가? 나만 핑크색이 아니라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던 걸까?’

이름 옆에 ‘갑’과 ‘을’의 입장을 괄호까지 쳐서 구분해 놓은 메일 내용을 곱씹지 않으려 해도 잠자리에 누우면 눈앞에 아른거렸고 자존심이 상했다. 처음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서 돈도 받고 사과도 받으려고 사인만 했던 허울뿐인 계약서 항목을 조목조목 따지며 반박 메일을 작성했는데 계약서조차 어찌나 허술했던지 8항 다음 6항이 나왔고, 문장은 중간에 끊겨있었으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내용도 본 프로젝트와 맞지 않게 뒤죽박죽이었다. 겉보기엔 당당해 보여도 속으로 잔뜩 가시를 움츠리고 내 살을 찌르며 살아가는 개복치들은 상대 탓을 하다가도 자기 의심으로 돌입하는 경향이 짙다. 차라리 편하다.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 이대로 밥 벌어먹을 생각은 버려야 하나?’ 자존감 하락과 자기 의심으로 똘똘 뭉쳐 한동안 어떠한 의뢰도 받지 않았다. 프리랜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있는 계약 파기였다.     




개복치 프리랜서가 살아남는 법 1

1. 화가 날 땐 커피 수혈이 먼저다.

2. 사인하기 전에 계약서는 꼼꼼하게 확인한다.

3. 아무리 돈을 많이 주더라도 프로젝트 성격 파악이 먼저다.




몇 주 전 일이다. 방금 도착한 문자가 눈에 띄었다가 사라졌다. 0.1초 사이에 발신자를 캐치했다. 그 업체였다. 평소엔 잘 확인도 안 하면서 왜 이럴 때만 열어보고 싶은 걸까? 경축할 소식이 단체 문제로 발송된 것이다. 대놓고 저주를 퍼붓지는 않더라도 배포가 크지 않아 축하는 못했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잊어버린 척 뼛속 깊이 새겨놨다 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출판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었나 검색도 해봤다. 물론 멋없는 짓이었다. 다행히 비슷한 제목으로 된 책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잊는 게 약이라고 했는데 미련은 남는 모양이다. 


프리랜서는 비교 대상이 없다. 회사에 다닐 땐, 내 옆자리 동료가 하는 PT, 사수의 보고서, 팀장님의 회의 진행 등 비교 요소가 아주 많다. 내가 제출한 카피 문구는 여러 차례 검열을 거쳐 온갖 코멘트와 함께 다시 내게 돌아오고 수정 끝에 최종 결정권자에게 제출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처음은 있었다. 비교 대상이 있던 시절도 보고서를 제출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팀장님 어깨너머를 서성거렸고 처음으로 돈을 받고 글을 썼을 때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클릭하며 불특정 다수의 반응을 살폈다. 어쩌다 상대를 잘 만나 타성에 젖은 모습을 들켜버렸던 모양인지도. 스쳐 지나가는 물방울 하나도 조심해서 피해야 하거늘 순간 방심으로 피부 조직을 하나 잃은 셈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신입 시절과 적응 시기가 있듯이 이제는 프리랜서 2년 차에 접어들어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어 조건을 조율하고 계약서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액수를 논하고 기간을 조정하고 계약서 내용 수정을 요청하는 게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면 ‘저는 얼마 이하로는 일 안 합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싶었는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계약서에 펜을 갖다 대기 전에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걸 요구해야 한다.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물론 주변에 프리랜서라곤 나 하나뿐이라 계약 파기가 흔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후에 들어오는 취재나 강연 요청에 확실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꽃 같은 결과만 남은 건 아니다. 타인과 함께하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아직까지도 책자, 백서, 가이드북 같은 기관 결과물 제작에는 손대지 않는다. 비록 핑크색 티셔츠 그룹과 한 책상에 못 앉게 되었지만, 덕분에 계약서는 잘 보게 되었다. 어쨌든 얻은 게 있어 다행이란 생각으로 오늘도 마감에 돌입한다. 일단, 커피 한 잔만 들이붓고.



* 내 청소년기 인생 바이블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Mean Girls)>에 나오는 장면이다. 수요일엔 반드시 핑크색 셔츠를 입어야 하는데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함께 급식실에 앉을 수 없다. 절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