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생에 사건사고가 많아야, 쓸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꿈에서 만난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아무래도 얕은 수면을 취하는지 기발하거나 해괴망측한 꿈을 꾸면 그 안에서도 '앗, 이것은 글로 남겨야 해. 잊어버리지 말자' 다짐하다가 몽유병 환자처럼 비몽사몽 간에 생각노트를 집어 들고 뚝뚝 끊긴 단어로 휘갈겨 기록한다. 바로 어젯밤 생각 노트에 담긴 꿈의 조각을 예로 들자면,
'손톱 = 일상 = 꾸준함 = 유지 = 청결 = 수집 = 행진'이라고 써놨는데 해석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이렇게 써놓더라도 몇 시간 뒤, 해가 뜨고 정신도 깨어날 때쯤이면 어떤 꿈이었는지 모조리 다 까먹기 일쑤다.
‘재빠르게 뒤쫓아 도망가는 시 구절의 꼬리를 붙잡아 끝에서부터 적어 내려갔어요.’
한 강연에서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마치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번뜩 스친 생각이 넘쳐흘러 도망가기 전에 일단 쓰고 본다는 어느 작가의 일화를 소개하는데 듣자마자 내가 외쳤다.
"이거 내 이야기잖아!" (당시 엘리자베스는 일화를 듣자마자 바로 ‘나랑 창작 방법이 같군요!’라고 이야기했단다. 감히 대작가와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무릇 창작이란 찾아오는 경로가 비슷한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딱히 수다스러운 타입은 아니었는데 밖으로 뱉는 대신 머릿속이 잔뜩 흐려질 정도로 몽상과 공상 사이를 헤맸다. 도저히 생각과 단어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펜을 들어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래서 독서를 좋아했다. 딱히 내가 이야기를 풀지 않아도 재미있는 상황과 대사가 담겨 있는 두꺼운 종이를 끼고 살았고 밖에 나가 뛰어노는 대신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덕분에 남들 보기에 무척이나 따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는 용돈이 생기는 족족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아이였다. 대신 책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들 – 주로 여성 – 에 스스로 대입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무인도에서 살아남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대저택에도 들어갔다. 당시에 읽었던 세계 명작 중 몇 권은 여전히 애정 하는 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직도 <작은 아씨들>을 처음 읽었을 때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평범한 중산층의 네 자매의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중 둘째 조 마치는 너무나 멋진 여성이었다. 진취적이고 모험심 강하고 글도 잘 썼으며 당돌하고 끈질겼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 엉뚱함, 모험심, 도전정신이 예술가가 마시는 마법 주스라고 생각했고 그런 측면에서 따지면 나는 본투비 예술가나 다름없었다. 지루한 걸 못 견디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었으니.
남들이 바라보는 나는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받는 난처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탓에 꼼수를 부려 도망가기 일쑤였고 모험심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일상성과 꾸준함을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수명 연장과 수익 창출을 위해서) 일상성과 꾸준함이야말로 진정한 마법 주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리랜서는 손이 아니라 엉덩이로 일하는 사람이다.
개복치 프리랜서가 살아남는 법 2
4. 생각 노트를 기록한다.
5.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명상으로 아침을 시작하자.
6. 메일은 하루에 2번만 확인한다. (집중!)
예정 없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성정을 지닌지라 겨우 구축해 놓은 습관과 규칙적인 일상을 잃어버릴까 스스로 조마조마한데 최근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비행기만 안 타면 평생 코로나에 안 걸릴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슈퍼 인자를 보유한 집안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나만 평범한 인자였던 모양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코로나에 걸렸다.)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가 묵직한 감각이 찾아왔고 다음날 심각하게 목이 칼칼했다.
‘에이 설마’
급한 대로 동네 내과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받았다.
“양성이네요.”
“네? 확진이에요?”
"네! 확진이네요. 허허."
의사 선생님은 경쾌하게 양성 선고를 내렸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코로나라고? 확진자 100만 명을 돌파해도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당사자가 될 거라곤... 꿈에서도 나오지 않은 사건이다. 확진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열이 났고 근육통이 심해졌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여러 차례 주사 바늘을 맞았단 말인가! 하루 걸러 한 번씩 차례대로 모든 증상이 찾아왔다. 근육통, 발열, 인후통, 오한, 다시 근육통이 왔다가 극심한 인후통으로 3일 내내 미음만 삼켜야 했고 격리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온전한 일상생활은 불가능했다. 감히 '코로나라 마감 좀 늦춰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프리랜서는 혼미한 정신을 두들겨 깨워 2차, 3차 검수를 끝냈고 일하는 동안은 신기하게도 근육통이 사라지는 기현상을 겪었다. 역시, 엉덩이만 멀쩡하면 못할 일이 없다. 아무래도 소처럼 일할 운명인가 보다. 꼬박 10일 동안 앓아눕고 나서야 기운을 차렸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손톱이 많이 자라 있었다.
“손톱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야.”
손톱을 깎는 일은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손톱이 길어도 불편한 일은 원데이 렌즈를 뺄 때뿐이라 딱히 손톱을 깎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요가 매트 위를 짚었을 때 밑이 누렇게 변한 손톱이 눈에 들어온다거나, 요리를 하다가 잘게 다진 재료가 손톱 밑에 끼면 크게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너무나 부끄러워진다. 그런데도 서랍 가장 아랫단에 넣어놓은 손톱깎이 꺼내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자라는 속도가 일정한 탓에 손톱깎이는 내 일상에서 가장 규칙적인 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밤낮없이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만 잤던 탓에 규칙성을 잃어버린 하루를 재개해야 했다. 손톱 깎는 일로 격리 해제의 신호탄을 올렸다. 어느덧 처서였다.
가을을 맞아 며칠 전에 노지 캠핑에 나섰고 정말 오랜만에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코로나에 걸렸던 탓에 한동안 금주를 했는데 목이 아파 침도 넘기지 못하는 지경이면서 선선한 야외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떠올랐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나는 식은땀이나 뻘뻘 흘리면서 미음만 삼키고 있다니. 억울하잖아.'
코로나만 완치되면 꼭 야외에 나가 맥주를 마시겠다고 노트에 적어놨었다. 자세히 보니 근육통으로 정신이 혼미하던 때 적어놓은 짤막한 분풀이도 있었다. 열이 심하게 올랐던 어느 새벽, 24시간 비대면 치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받은 상대는 받자마자 이렇게 응대했었다.
"코로나라고요?... 9시 되면 전화 주세요."
울화통이 터져 열이 몇 도 더 올랐을게 틀림없다. 분노를 담아 적어놨는데 그새 잊어버렸네.다행히도 야외 맥주는 잊지 않고 실행했다.
코로나 격리 중에 낮밤이 바뀌면서 딱히 할 일도 없던지라 무작위로 영화를 틀어놨었다. 영화 <작은 아씨들>도 다시 봤다. 감정은 생생한데 결말이 흐릿했다.
'맞아, 조 마치는 로리를 차고 ‘여성’과 ‘신인’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결국 출판에 성공했었지.'
물론 소설의 결말을 결혼으로 타협해야 했지만, 출판에 성공한다. 이름에 걸맞게 꿈을 향해 행진(march)하던 주인공은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조(Jeo)처럼 나 또한 ‘출간하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 최소 100군데 출판사에 기획안과 원고를 보내야 한다는 온라인상 익명의 조언가의 조언에 따라 출판사 메일을 수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쓰면서 원고를 완성하는 한편, 출판사에 원고 응모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원고 투고합니다.'로 시작한 메일을 몇 차례 보냈을 무렵, 운 좋게 한 곳과 출판 계약을 맺게 되었다. 계약을 맺자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읽고, 쓰고, 또 읽고. 내 인생에서 그토록 충실하고 성실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던 적은 없었다.
생존을 위한 억지 실천이 아니라 내재화된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충고이자 잔소리라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내 것으로 만들기 가장 어려운 습관이다. 하지만 실천하다 보면 때가 찾아온다. 어느 순간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