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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Sep 29. 2022

개복치의 이국적 정서

여권 만료가 4개월 남았더군요.


내게 이국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여행지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요즘 유독 선명하게 기억난다. 당시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분명 이국적인 정서를 불러일으켰던 요소였을 것이다.

‘와... 저것 좀 봐봐. 유럽 같아.’와 같은 감상을 일상생활 속에서 우연히 내뱉기라도 할 때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마치 흙속에 숨어 있던 아주 오래된 내 잔뿌리의 일부라도 만난 듯 감격스러워진다. 한국에서 태어나 몇몇 여행의 조각 그리고 잠시 해외 근무했을 때를 제외하면 인생 모든 시간을 한국 땅에서 보낸 사람의 허세로 봐주자. 아니면 강렬했던 한 때의 추억으로 아주 오랫동안 단물이 빠지고도 이용하는 단골 레퍼토리 삼거나. 그렇다고 이국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가로수 사이로 내리는 햇살 조각을 싣고 자전거를 내달리는 것.
화창한 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심 지역, 테라스가 있는 카페 야외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
전 세계 어디서나 천편일률적인 스타벅스에 매장에 들어가 내 이름이 적힌 아메리카노를 기다리면서 제조하는 바리스타와 음료가 담긴 일회용 컵을 바라보는 것.


평소엔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피로에 절여진 상태라 주의 관찰이 떨어졌다는 변명으로 즐기지 못했던 일들이 낯선 시공간에 떨어지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럴 때 '아, 이국적이야!'가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늘 그렇듯 모든 게 널브러져 있는 집안에서 도저히 책상에 앉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옷이 사방 군데 걸쳐 있어 이젠 내가 옷이 될 지경인 공간을 치우기보다 벗어나기를 택했다.

‘오늘은 바쁘니까 주말에 치우자.’

실은 어제가 일요일이었다. 거대한 공유 오피스나 다름없는 가까운 스타벅스로 도망 나와 주문을 하고 옆에 서서 음료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면서 문득 언젠가의 맨체스터 여행을 떠올렸다. 하늘엔 회색 구름이 가득한 날이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갈팡질팡 하는데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출근 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카페인 충전이 필요한 직장인들이 한바탕 몰렸다가 빠진 매장 안은 한산 했고 베이커리 메뉴도 휑그러니 비어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레이에요. 알, 에이, 와이 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멍하니 바리스타의 빠른 손놀림을 바라봤다. 우리나라도 초록색 앞치마였던가? 여전히 매직으로 이름을 써주네? 비슷한 조도, 메뉴명, 바리스타의 옷차림, 일회용 컵, MD 상품 등 다를 거 하나 없는데 뭔가 낯설었다.

“레이, 음료 나왔어요!”
“고마워요”

간단한 눈인사를 건네고 음료를 받아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밖과 마주 보고 앉았다. 흐린 하늘, 등이 동그란 까만 택시, 도로 위 트램. 생소한 요소가 줄지어 스쳐 지나갔다. 나갔던 시선이 다시 안으로 들어와 Ray라고 흘겨 쓴 컵 위에 멈췄다. 그제야 나는 흠칫 놀랐다.

‘맞아, 여기 외국이야’

갑작스레 몰려드는 이국적 정서에 흐린 날씨는 신경 쓰지 않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여행 중이라는 극명한 사실보다 실체 없는 정서 따위에 마음이 동해 냅킨에 생각을 끄적거리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날 어찌나 많이 걸었던지 호텔로 돌아왔을 때 양쪽 종아리는 퉁퉁 부어있었다.


마치 장면이 오버랩되듯 어제까지 화창했던 하늘이 오늘은 흐렸다. 창밖엔 낙동강이 흐르고 유턴 자리에 공사를 알리는 형광색 고깔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설레기 시작했다. 드라이브 스루 지점은 오전이 가장 바쁘다. 매장에 들릴 시간조차 없는 바쁜 사람들이 드라이브 스루에서 음료만 가지고 서둘러 갈 길을 간다. 그래서 매장 안 음료가 나오기까지 평소보다 오래 걸리기도 한다. 저들은 어디를 향해 급히(혹은 여유롭게) 가는지 궁금해졌다.

'제발 여행은 아니길, 흐린 날, 그것도 평일에 떠나는 여행만큼 짜릿한 건 없단 말이야.'

괜히 못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가 떠올랐다. 차 안에 앉아 있는 고객에게 음료를 건네주는 바리스타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모양이다.

‘여권 갱신 문자를 받은 것 같은데...’

아뿔싸. 2월 만료다. 비행기 구경한 지 하도 오래돼서 여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타벅스 컵 하나로 2년 전 맨체스터 여행까지 떠올렸으면서 한 동안 여행을 못 떠나 심보가 뒤틀리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전부 시들시들해졌다. 이 갈대 같은 마음을 나조차 어찌할 길이 없다. 자극이 필요하다. 그래, 오늘은 좀 색다른 음식을 먹어야겠다. 요즘 개복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갑자기 회가 먹고 싶어졌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곳엔 초밥을 파는 식당이 없지만 오늘 나는 스타벅스가 있는 남의 동네에 와있다.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고 초밥집을 검색했다.  

'사장님 혼자 장사하시는데 4시 30분부터 영업하세요. 늦게 가면 1시간 넘게 기다리는 찐 맛집!'


후기를 보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달려갔다. 다행히 개복치는 없었다. 연어와 참치 초밥을 주문하고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게가 크지도 않고 인테리어도 무난한데 장사가 될까?

낮은 다리 옆 도로변에 자리 잡은 작은 초밥집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특색이 없었다. 오사카의 어느 기차 역 근처 골목길에나 있을 법한 가게 외관은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게다가 맛있었다. 밥이 많으면 회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 여기는 적당한 개수의 밥알을 뭉쳐 숙성 연어와 참치를 올렸다. 뜻밖의 맛 덕분에 식당에 오기 전까지 생각났던 맨체스터나 이국적인 스타벅스 그리고 만료 4개월 전 여권 생각이 쏙 들어갔다.



여행 중엔 늘 뜻밖의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맛을 만나게 되고 언제까지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생각해 보니 프랑스 한 달 살기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베트남 쌀국수였다. 카타르 근무 시절에는 터키식 양고기가 일품이었고 맨체스터에서는 스타벅스 커피가 제일이었다. 이젠 바다도 없는 도시에서 먹는 초밥도 목록에 이름을 더했다. 또다시 활기가 돋는다. 여행보다 일이 중요해진 30대의 개복치는 초밥 하나로도 여행의 정서를 찾아낼 수 있다.


“작가님, 혹시 000에서 의뢰가 들어왔는데 가능하실까요? 마감기한이 좀 짧아요.”
"그래요...(네, 당연하죠.) 흠..."


스타벅스에서 작업하면서 새롭게 의뢰가 들어온 참이었다. 고소한 참치 뱃살이 올라간 초밥을 입에 쏙 넣으며 기쁜 소식을 공유했다.

"맞다, 나 일 또 들어왔어. 이거 내가 살게."


구한말 배를 곪는 어느 무명 시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콜록콜록 여보, 드디어 내 글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소. 드디어, 쌀을 살 수 있게 되었단... 콜록콜록... 말이오.”

"네? 정말요?"


 짝꿍은 이렇게 응답했다.

"그럼 우리 연어 초밥 한 세트 더 시킬까?"


잠시 여행의 정서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즐겁게 하루가 흘러간다. 이렇게 된 거 본가에 가서 여권이나 찾아와서 갱신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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