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수집가(2)
2년 전 나는 리스본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어야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마다 그때 생각, 그러니까 내가 놓치고 만 리스본행 비행기 티켓 – 가격이 무려 300만 원이 넘는 – 이 떠오르며 배가 싸리싸리 아프다.
리스본행 비행기 티켓은 내 이름으로 예약된 마지막 항공편이었다. 항공사를 그만두면서 퇴사 선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왕복항공권을 받으며 망설임 없이 포르투갈, 리스본을 선택했고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돌아와 현생이 지칠 때쯤 떠날 수 있도록 출발 날짜를 1년 뒤로 설정해 놨었다. 그때쯤이면 박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이상한 전염병이 사라질 줄 알았다.
아무래도 여행하는 법을 까먹은 듯하다. 낯선 공항에 내려 무엇을 타고 시내까지 이동했는지, 구글맵도 없이, 로밍도 없이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운 좋게 숙소 앞까지 다다랐는지, 하루종일 아픈 다리를 끌고 어떻게 걸어 다녔는지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 여행이 낯설게 느껴진다. 원래 여행은 낯선 것이라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일상보다 낯선 여행에 더 정을 붙이고 가깝게 살던 게 나였는데 나와 아주 먼 존재처럼 여겨진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잠들지 못하는 잠이면 어김없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꺼내든다. 문두스는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고고한 학자이자, 현자이지만 오늘만큼은 어쩐지 나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평생 여행이 뭔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충동적으로 올라탄 리스본행 열차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책이 절반을 향해 달려가면서 ‘이 교수는 왜 여행을 하고 있는 거지? 본인이 여행 중이라는 자각은 있는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언어 – 따분하다는 말은 때론 위대하다거나 어렵다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 불리는 고매한 학자는 포르투갈어에 홀려 일탈을 선언한 것일까? 문두스가 흐릿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새롭게 보며 운명적 만남에 이끌리는 장면에서 나는 내가 놓친 리스본을, 여행을 더욱 면면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당신의 리스본행 왕복 티켓이 예매되었습니다.’
예약 확정을 알려주는 메일 한 통을 중요 메일로 구분해 둔 뒤 우울할 때마다 다시 들여다본다. 마스크를 여러 겹 겹쳐 끼고서라도 가겠다고 생떼를 잠시 부려봤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지속적으로 날아오는 출국 알림 메일에도 두 눈 질끈 감고 무시해야 했다. 매번 도서관에서 빌려읽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광화문 서점에 가서 구매한 시점도 이때쯤이다.
놓쳐버린 리스본행 티켓이 더욱 아깝고 서글프게 느껴지는 밤이다. 내 손에 쥐어진 실물은 없지만 아주 새것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 모형이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고 상상한다. 이번 주말도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