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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일 큐레이터 Jun 10. 2017

브랜드 히스토리 (3) 크리스찬 디올 part. 2

창립자 디올이 떠난 후 그의 환상을 재현한 디자이너들

1) 이브 생 로랑 (1957-1960)

 생전 크리스찬 디올에게는 아끼던 두 명의 조수가 있었다.

하나는 피에르 카르뎅, 다른 하나는 이브 생 로랑.

그중 1955년 19살의 나이로 디올에 입사한 이브 생 로랑은 뛰어난 재능과 감각으로 디올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57년 가을 컬렉션에는 무대에 올라온 50 여벌의 의상 중 중 무려 35 벌을 디자인하며 크리스찬 디올의 무한 신뢰를 쌓았다.

다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불과 21세에 거대한 디올 하우스를 맡게 된 이브 생 로랑.

그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다음 컬렉션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과연 위기에 빠진 디올 하우스를 구할 수 있을까?


1958년, 이브 생 로랑은 프랑스 인들과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디올의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가 선보인 ‘트라페즈 라인(Trapéze Line)’은 사다리꼴로 우아하고 발랄하게 펼쳐지는 드레스 라인. 그의 옷은 창립자 디올의 옷처럼 완벽하게 재단됐고 화려한 원단을 사용했지만 이전보다 좀 더 부드럽고 가벼우며 입기 쉽게 디자인된 게 특징이었다.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사랑스러운 트라페즈(사다리꼴) 라인. © Laziz Hamani

그의 컬렉션은 극찬을 받으며 마무리됐고 파리의 시민들은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 후로도 계속 이브 생 로랑은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파리 패션계에서 맹활약을 했다.


성공에 고무된 그의 디자인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대담해졌다. 1960년에 길거리 재즈 클럽, 카페의 청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보헤미안 풍의 '비트 룩(Beat Look)’을 내놓았는데 디올 특유의 우아한 의상을 기대했던 귀부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파격적인 컬렉션에 분노한 부삭 사장과 디올의 경영진은 그를 해고했다. 6개의 컬렉션을 발표한 후 디올을 떠난 그는 이후 또 다른 전설적인 브랜드 '이브 생 로랑'을 세운다.


2) 마크 보앙 (1961~1989)

1961년, 파리 출신의 디자이너인 마크 보앙 (Marc Bohan)이 디올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했다.

보수적인 취향을 가진 그는 안정적으로 디올 하우스를 이끌었고 그가 디올에 머무는 동안 아동복 라인 '베이비 디올'과 코즈메틱 라인, 남성복 라인인 '디올 옴므'를 차례로 런칭한다. 그는 1989년까지 무려 28년간 수석 디자이너를 맡아 가장 오랫동안 디올 하우스를 지킨 디자이너로 남아있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등장과 LVMH 인수합병>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디올은 경영위기를 맞았다. 이미 디올의 모기업인 부삭 그룹은 파산 신청을 한 뒤였고 거의 모든 매장이 적자였다. 80세의 고령이었던 마르셀 부삭 사장은 패션업계의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채 사망한다. 부삭 그룹은 SFFAW라는 회사에 인수되었음에도 거대한 부도 상태를 막을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까지 개입해 재정 지원을 했다. 여러 브랜드가 디올 인수에 관심을 보였고, 이때 SFFAW를 인수한 사람은 현 LVMH그룹의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였다. 그는 1984년 인수 후, 과감한 구조조정을 감행, 크리스찬 디올 등 사업적 가치가 있는 브랜드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를 모두 매각했다.

그에게는 명품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고 당시 루이비통 등을 소유한 LVMH (Louis Vuitton Moët Hennessy) 그룹에 눈독을 들였다. 그는 다른 브랜드를 인수하며 서서히 사업 규모를 확장했고 LVMH의 회장과 부회장 사이에 경영권 다툼이 있는 틈을 이용, LVMH의 지분을 다수 획득한다.

이후 아르노와 부회장이었던 앙리 라카미에는 그룹 지배권을 놓고 법정 싸움을 벌이는데 1990년, 법원이 아르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그는 40세의 나이에 LVMH를 소유하게 된다. 당시 언론은 그를 비윤리적인 ‘기업 사냥꾼’이라고 비난했지만 아르노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LVMH를 거대한 명품 제국으로 키우는데 집중했다. 그가 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위기를 맞았던 디올의 재정과 경영 상태는 현저히 나아졌고 오늘날 LVMH는 패션, 와인, 화장품, 보석 등에 걸쳐 60개가 넘는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명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3) 지안 프랑코 페레 (1989~1996)

1989년, 이탈리아 출신의 지안프랑코 페레 (Gianfranco Ferré)가 프랑스 출신이 아닌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디올 하우스를 맡게 되었다. 프랑스 패션을 대표하는 디올의 수장 자리에 외국인을 앉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변화를 원했던 아르노 회장은 페레를 과감하게 영입하며 브랜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젊고 활기차게 바꾼다. 또한 그는 자체적인 브랜드 상품에 집중하고 제품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라이센스 사업의 규모를 대폭 감소한다. 페레는 디올의 역사를 연구하며 컬렉션을 준비했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불어넣은 컬렉션으로 성공하며 프랑스에서도 인정받는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의 옷은 창립자 디올 시대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존 갈리아노 (1996~2011), 디올 제2의 전성기

그는 늘 모델들처럼 컬렉션 테마에 맞춰 옷을 차려입고 쇼 피날레를 장식했다. 출처: john-galliano.tumblr.com

1996년, 디올 하우스는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강력한 추천으로 당시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젊은 영국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를 새로 기용한다.

이번에도 프랑스 출신이 아닌 디자이너를 영입한 데에 아르노 회장은

나 역시 프랑스 출신의 디자이너를 선호했지만 재능에는 국경이 없다. 갈리아노에게는 창립자 디올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재능이 있다. 그는 크리스찬 디올과 디올 하우스를 상징한 로맨티시즘, 페미니즘, 모더니티를 합쳐놓은 놀라운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옷을 창립자 디올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느낀다.

라고 밝히며 갈리아노의 영입을 추진한 자신의 결정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1997년, 천재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디올의 오트 쿠튀르 쇼를 컬렉션을 세상에 내놓는다.

파리의 그랜드 호텔에 초대된 관객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벽은 온통 수 천 개의 장미로 뒤덮이고 금빛 의자를 배치한 이 컬렉션은 갈리아노의 창조성이 돋보이는 찬란하고 웅장한 쇼였다.


존 갈리아노의 신문지 드레스를 입은 사라 제시카 파커 <출처: pinterest>

존 갈리아노의 과감한 행보는 계속됐다. 2000년 봄 컬렉션에서 디올의 데님 로고를 발표하기도 했고 길거리 노숙자에게 영감을 받아 신문지 프린트를 사용한 '홈리스 쇼' 등 로맨틱과 과격함, 럭셔리와 저속함의 경계를 오가는 대담한 컬렉션을 계속 내놓았다. 갈리아노의 영입 이후 디올은 매 시즌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브 생 로랑의 비트 룩이 그랬던 것처럼 디올의 기존 고객들은 이런 파격적인 컬렉션을 외면했다. 하지만 무관심보다는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게 낫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아르노 회장은 새로운 고객들이 몰려올 것이라며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젊은 여성들이 디올에 열광했고, 디올은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항상 무대 의상을 보는 것처럼 화려했던 그의 의상들과 그의 손에서 재탄생한 '뉴룩'


뉴룩 탄생 60주년을 맞은 2007년, 존 갈리아노는 일본풍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오리가미 드레스'를 내보이며 그의 한계 없는 상상력을 보여줬다.

종이접기가 연상되는 '오리가미 드레스'
화려한 색감의 일본풍 드레스


5)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만' (2000-2007)

내 옷을 입고 싶다면 남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존 갈리아노가 디올의 여성복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때 디올 하우스는 2000년, 젊은 디자이너 에디 슬리만 (Hedi Slimane)을 영입해 남성복 ‘디올 옴므 (Dior Homme)’를 새롭게 단장한다. 슬림핏 위주의 옷을 선보인 그는 근육질의 남성을 선호하던 당시의 남성상을 깨뜨리고 전 세계에 스키니진 열풍을 일으키며 21세기 남성복의 트렌드를 주도했다. 브래드 피트, 믹 재거 등이 그의 고객이었으며 샤넬의 수장인 칼 라거펠드 또한 그의 옷을 입기 위해 무려 42kg을 감량하는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 그는 2012년 '이브 생 로랑'의 수석 디자이너로 자리를 옮겼으며 브랜드 이름을 '생 로랑'으로 개명하고 터프하고 중성적인 락시크 이미지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다이어트를 동반해야만 했던 에디 슬리먼의 슬림핏 수트.


2011년, 존 갈리아노가 유대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동영상이 퍼지며 큰 비난을 받았다.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디올 하우스는 즉각 그를 해고했다. (그는 후에 자숙 생활을 마치고 2015년,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로 다시 패션계에 컴백한다.)


6) 라프 시몬스 (2012-2015)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가 다시 공석이 되었다.

갈리아노와 함께 일했던 영국 디자이너 빌 게이튼(Bill Gaytten)이 임시 디자이너로 2012년 2 개의 컬렉션을 이끌었지만 혹평을 받았다. 존 갈리아노처럼 강력하게 브랜드를 이끌 인물을 찾던 디올 하우스는 여러 차례 고심 끝에 당시 질 샌더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라프 시몬스(Raf Simons)를 디올의 6번째 수석 디자이너로 낙점했다.


그가 처음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그와 크리스찬 디올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남성복 디자이너였고 오트 쿠튀르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심플하고 실용적인 옷을 만들던 그가 과연 화려하고 우아한 디올의 이미지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 후 재기 발랄하고 털털한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가 디올과의 전속 모델 계약을 체결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완벽한 케미를 자랑하며 디올의 이미지를 새롭게 쇄신하는데 크게 성공한다.

신선한 콤비였던 라프 시몬스와 제니퍼 로렌스 <출처:vogue.co.uk>

라프 시몬스는 벨기에 출생으로 대학에서는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남성복 브랜드 '라프 시몬스'를 선보였고, 2005년에는 미니멀리즘으로 유명한 브랜드 '질 샌더'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가 남성복 디자이너에서 화려한 오트 쿠튀르를 지휘하는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 변하는 과정은 영화 '디올과 나'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디올 하우스에 입성하고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까지 남은 시간은 '단 8주' 뿐이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은 이 영화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은 그가 느꼈을 책임감과 부담감을 담아내며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다큐 형식의 영화인 '디올과 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잘 보여준다.

기성복만 만들었던 그는 디올 아뜰리에에 수 십 년간 머물렀던 장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오트 쿠튀르 작업 방식을 체득해나가고 창립자 디올의 아카이브를 꼼꼼히 연구하며 첫 컬렉션의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크리스찬 디올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되살리는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넣고자 한 그는 "기존의 오트 쿠튀르 양식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다시 창립자 디올 시대부터 새 출발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린 그는 2012년 7월, 존 갈리아노 시절 주로 컬렉션을 열었던 로댕 뮤지엄 대신 파리 근교의 별장에서 생애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다. 디올에게 평생 영감을 준 정원을 닮은 꽃들로 장식된 그의 컬렉션은 소수의 VIP 클라이언트, 패션 에디터, 셀레브리티들만 초대해 진행이 되었는데 그때 참석한 리스트에는 디자이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마크 제이콥스, 도나텔라 베르사체, 안나 윈투어, 마리옹 꼬띠아르, 제니퍼 로렌스 등이 있었다. 동시에 디올의 온라인 매거진에서 쇼가 생중계되었고 쇼가 끝난 이후 트위터에는 그의 컬렉션에 대한 찬사의 트윗들로 뒤덮였다.   

라프 시몬스 버전의 간결하고 깔끔한 '뉴룩'

 전 세계가 주목한 라프 시몬스의 데뷔 쇼는 극찬을 받으며 다시 디올을 트렌드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창립자 디올의 '뉴룩'을 간결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았다. 1940년대 디올이 발표한 실루엣을 유지하되 현대 여성들의 생활상을 반영해 움직임이 편하도록 첨단 테크놀로지를 적용한 원단과 재단 방식을 채택했다.

 그의 디자인은 존 갈리아노의 드라마틱한 의상과 극명하게 반대되었는데 갈리아노가 이끄는 디올이 무대 의상처럼 스펙타클했다면 라프 시몬스의 디올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실루엣 위주였다. 갈리아노뿐 아니라 기존의 과하게 화려했던 오트 쿠튀르 의상과 대조되던 그의 혁신적이며 순수한 컬렉션은 '뉴 쿠튀르'라 명명되며 패션계에 깔끔하고 실용적인 오트 쿠튀르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오마주한 백과 슈즈 <출처: highheelconfidential.com>

 그의 컬렉션에는 늘 창립자 디올의 정신이 어려있었다.

2013년 봄 컬렉션에는 과거에 갤러리를 하고 동시대 아티스트들과 교감을 나눴던 디자이너 디올의 예술가적인 면모에 주목해 앤디 워홀의 작품을 프린트한 클러치 백을 선보이는가 하면 레오파드 열풍을 불러일으킨 디올의 호피무늬 프린트를 재해석한 얼룩무늬를 컬렉션에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끈 그의 또 다른 행보는 매출 전반을 책임지는 핸드백 모델로 쾌활한 미국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를 발탁한 일이다. 엑스맨, 헝거 게임 등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히로인이며 거침없는 입담으로 유명한 그녀 역시 처음에는 기존의 우아하고 여성적인 디올의 이미지와는 다소 이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올드한 이미지로 여겨지던 디올 하우스에 그녀 특유의 통통 튀는 매력을 불어넣으며 2-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다.    

청바지를 입고 촬영한 핸드백 캠페인 <출처:dior.com>
젊은 여성들을 끌어모은 화장품 광고


특히 영화'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보여준 탁월한 연기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영예로운 순간, 그녀가 입었던 디올의 드레스는 전 세계를 매혹시켰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순간마저도).

'디올과 나'를 보고 제니퍼 로렌스가 라프 시몬스에게 영화배우로서의 조언을 주기도 했고 누드 사진 스캔들로 그녀가 곤욕을 치를 때도 시몬스가 그녀와의 전속 계약을 연장한 일화 등을 보며 그들이 함께 내는 훈훈한 시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오면 멈출 겁니다. 패션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건 아니거든요.

디올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던 라프 시몬스는 그러나 3년 6개월 만에 디올의 수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디올 하우스와 자신의 남성복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던 그는 일 년에 컬렉션 6개, 오트 쿠튀르 쇼 2개, 총 8개의 쇼를 생산해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디올 하우스를 떠나는 사유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도 중요시하는 그에게 그동안 미친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미니멀한 서체로 디올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 나간 후 홀연히 떠난 라프 시몬스.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힌 적도 있던 그는 예전처럼 벨기에에서 그의 남성복 컬렉션을 담당하다 2017년 '캘빈 클라인'의 수석 디자이너로 돌아와 우리들에게 여지없이 매혹적인 컬렉션을 다시 선사했다.


7) 마리아 그라찌아 키우리 (2016-현재)

라프 시몬스가 떠난 후 디올 하우스는 몇 시즌 동안 디렉터 없이 컬렉션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던 중 새로이 디올에 입성한 이는 '발렌티노'의 전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리아 그라찌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

여성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여겼던 창립자 디올이 세운 하우스에 드디어 여성 수장이 임명되었다. '발렌티노'를 순조롭게 운영해왔던 그녀는 2016년 9월, 디올에서의 첫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을 내놓았다.   

디올이 아닌 발렌티노 쇼 같다는 평을 받기도 한 그녀의 첫 컬렉션

 그러나 그녀가 선보인 레이스 드레스와 겹겹이 레이어 된 시스루 드레스 등은 너무 발렌티노스럽다는 평을 받으며 패션계는 멘붕 했고 사람들은 엇갈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는 분명히 디올의 시그니처 요소를 똑똑하게 반영하면서 동시의 자신만의 페미니즘적 색채도 곳곳에 심어놓았다.

그녀는 과거 에디 슬리먼이 디올 옴므에서 선보였던 벌 무늬 프린트를 재현했는데 창립자 디올의 아카이브만을 주목했던 페레와 시몬스와는 달리 그녀는 그 이후의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도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또한 캘빈 클라인을 필두로 한창 유행하던 로고 밴드를 드레스의 스트랩이나 구두에 달면서 트렌디한 면도 강조했다. 첫 컬렉션 테마를 펜싱 선수로 잡고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슬로건 티셔츠를 공개하며 그녀는 디올이 새로 추구해나가야 할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아름다운 옷들을 통해 제시했다.

동굴 벽화와 뉴룩, 타로 일러스트 이 모든게 융합된 리조트 컬렉션

2017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세련된 청청패션을 내세운 젊고 캐주얼한 쇼로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았고, 최근 5월 중순에 캘리포니아 LA 외곽의 사막에서 열린 리조트 컬렉션 또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야생 동물들이 출몰하는 허허벌판인 이곳에 관객들을 위한 임시 천막을 치고 디올 광고에 종종 등장하는 커다란 열기구를 뒷배경으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모델들이 등장했다. 그녀는 디올의 뉴룩과 야생 동물, 동굴 벽화, 페미니스트였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과 빅키 노블의 타로 일러스트 (생전 디자이너 디올은 미신과 타로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등의 요소를 다채롭게 융합한 컬렉션을 선보이며 디올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곁들였다.  

당당한 그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다음 편에는 '디올의 마케팅 전략과 뮤즈들'에 대한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모든 컬렉션 이미지는 vogue.com에서 가져왔습니다.


<참고문헌>

www.dior.co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Dior_SE

보그 ‘2015,라프 시몬스와의 인터뷰’

보그 ‘디올과 랑방을 떠난 라프 시몬스와 알버 엘바즈’

네이버 캐스트 ‘에스프리 디올- 디올 정신 전’

'패션의 탄생', 강민지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 (세계 브랜드 백과, 인터브랜드)

패션쇼 리뷰하기(2)

제니퍼 로렌스, 라프 시몬스,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에서 만난 예측 불가능한 커플의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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