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질리도록 치여봤다

독일일상 에세이

by 소시지

치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키가 좀 왜소한 편이어서 어디 가나 좀 치이는 편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내 몸뚱이를 가누기가 힘들다고 느껴진 적이 많다.

특히 한국의 지하철이나 만원 버스에서 작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힘겨운 싸움은

아마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싶다.


이 물리적인 싸움이야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치지만

더더욱 참기 힘든 치임은 정신적인 영역의 치임이다.

한국에서ㅜ흔하게ㅜ겪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무자비함?

아니다. 그건 그저 꾹! 꾹! 상황에 의해 눌려진 감정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상황과 직위와, 위치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늘 눌려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툭! 하고 닳고 닳은 쪽으로 그 감정이 터져버린다.

그 닳고 닳아 버린 얇은 천조각이 터지는 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늘 다른 사람의 감정주머니천의 바래진 부분 바로 앞에 위태롭게 서있던 것일까?


나는 집 앞에 있는 지하차도 앞을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 터널 앞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아저씨의 수신호가 잘 보이지 앗다.

오라는 건지 뒤로 가라는 건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아저씨의 감정이 나에게로 터졌다.

아저씨는 주먹을 치켜올리며 나를 위협했다. 그 행동에 나도 터져버린다.

너무 바쁜 일상에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그리고 책임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나의 취약한 감정 주머니, 고단했던 세월의 흔적이 고대로 묻은

낡아서 너덜거리는 내 감정 주머니가 꿰매도 꿰매도 티가나는 그 주머니가

한국에서는 자꾸만 터지고 수습하기가 반복이 되었다.

그 스치기만 해도 터질듯한 나의 너덜너덜한 안쓰러운 감정주머니가 말이다.

나의 감정주머니는 한국에서 늘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나의 위태로운 주머니는 독일에서는 치이지 않는다.

마트에 가는 길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에서는 내 공간을 배려해서 내가 그 통로를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준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왠지 대접받는다는 민망함에 종종걸음으로 그 통로를

코리안 스피드로 지나갔다. 또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는 차량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건너도 된다.

한 번은 차량이 지나갈 때까지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다 하이빔을 올리고 지나가는 차량에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이빔은 지나가라 내가 속도를 줄일 거다라는 말이라고 했다.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니, 내 위태로운 주머니에 경계가 생기는 느낌이다.

함께 티타임을 갖는 시간에 빵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나름 친하다고 생각한 사이에서도

내 빵을 나눠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예의 없는 질문이냐고 물어보고 질문을 한다.

그들의 따뜻한 배려에 정신적인 경계가 생기는 느낌이다.


난 그들의 무관심에 그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그들의 정신적 거리에 난 나의 주머니를 종종거리며

돌보지 않아도 되는 느낌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관심 없는 그들의 무관심에 숨이 쉬어지고 나의 실수는 그냥 나의 책임일 뿐 그에 대한 대가도 내가 치르는 것이기에

잔인하리만큼 정이 없어 물질적인 손해를 볼지언정, 질책 없는 무관심에 숨이 쉬어진다.

나는 잠시 내 위태로운 감정 주머니를 조금은 손보고, 조금 더 예뻐해주고 싶고,

그래서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심지어 예쁜 색깔이 있는 주머니로 바꾸어주고 싶은 맘도 생긴다.

그렇지만 영원한 것은 없기에,

예쁜 비단 천이 너덜거리면 얼마나 더 비참해 보일까 하는 생각에 다시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그냥 단단한 무명천으로 기워야 하지 않을까,

독일날씨처럼 색깔 없고,

독일사람처럼 실속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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