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는 넓은 창문을 잘 달지 않는다. 나는 그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서울의 대학에 합격한 뒤 자취방을 구할 땐 내가 돈이 없어 그런 줄 알았지만, 좋은 직장을 잡았을 때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엌에서 밖을 내다보려면 싱크대 앞에 허리 숙이고 고개를 쭉 빼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는 많은 이들이 저녁마다 비좁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설거지를 할 것이다……. 뻥 뚫린 주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그 사실이 퍽 괴상했다. 할머니의 음식점은 평수가 좁았으나, 주방 창문만큼은 극장 화면처럼 널찍했으니까. 문 열고 들어오면 창문을 통해 맞은편 바다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누나와 나는 그 풍경에 가끔 넋을 놓았다. 만두를 얹은 찜통이 들썩거리고 할머니는 돼지고기와 숙주를 볶는 중인데, 창문 너머 파도는 언제나 소리 없이 일렁거렸다.
아버지는 해외 출장 가는 여름방학 동안 우리를 맡겨둔다고 했으나,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한 달이 지나자 확실해졌다. 학교로 돌아갈 즈음이 되었는데도 아버지는 할머니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은 그때의 당혹감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소해나갔다. 누나는 마치 다른 가게에서 심어놓은 작은 폭탄처럼 소란을 피워댔고, 나는 누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할머니는 우리를 2층에 틀어박은 채 손님을 맞았다. 2층은 천장이 낮은 다락방에 가까웠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양쪽이 진녹색 커튼으로 둘러싸여 마술쇼 한복판에 선 기분마저 들었다. 커튼을 젖혀보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듯 의외의 풍경이 나타나곤 했다. 왼쪽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창문 앞에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옷장과 침대가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부침개, 메밀국수,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 잠들기 전이면 꼭 한 잔씩 마신 핫초코……. 아버지가 등허리 긁으며 끓여주던 라면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할머니는 틈틈이 만들어주었다. 돌이켜보면 2층에서 조용히만 있어주길 바랐던 것일 텐데, 우리는 그 소박한 희망에 부응하기는커녕 더욱 기운이 뻗쳐 뛰어 다니기 일쑤였다. 한번은 녹색 커튼들을 밀림이라 상상하고 술래잡기를 했다. 누가 안락의자에 앉을지 다툰 게 화근이었는데, 커튼을 급하게 젖히며 쫓고 쫓기다 보니 장대에서 나는 쇳소리가 정말 맹수가 열대림 헤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커튼을 찢을 듯 젖히고 서로에게 팔을 뻗치고 테이블에 몸을 던지는 통에 커튼이 한 장 뜯겨나온 뒤에야 우리는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황급히 올라온 할머니는 손주들이 유령 흉내 내듯 커튼 뒤집어쓴 꼴을 목격했고, 우리는 이튿날부터 주방에서 일을 거들게 되었다.
“설마 그걸 다 잊어버릴 정도로 후레자식은 아니겠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누나는 다짜고짜 어렸을 때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살았는지 기억하느냐고 입을 열었다. 말투만 보면 누나는 공범이 아니라 빚 갚으라고 대신 독촉해주는 전문 심부름꾼 같았다. 책임 회피하는 듯한 말을 먼저 들어서 그럴까? 나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본론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곁에서 변화를 지켜보았을 누나야말로 더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내가 휴가를 쓰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을 받아들이기도 버거워했다. 일주일, 일주일……. 혼자 몇 번이고 되뇌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여전히 침착하고 옷차림도 말끔해서 남들은 이상한 줄도 모를 거라고, 입맛이 조금 까다로워졌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누나는 내게 상황을 전달하면서 본인 마음이 정돈된 모양인지, 올 때 호두나 사 오라며 말을 맺었다.
“호두? 설마 지금 호두가 두뇌 모양이라서 치매에 좋다는 미신을…….”
누나는 아아, 하는 짜증 섞인 탄식으로 내 말을 끊어버렸다. 집을 떠나 타지에 취업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주 익숙한 패턴이 통화 시작한 지 5분 만에 되풀이되고 있었다. 누나야 지금껏 거의 평생 할머니 밑에서 일했으니 지적이라면 이골이 날 만도 했지만, 나라고 해서 남의 말에 토를 달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어렸을 적 우리가 주방 일꾼이 된 뒤로 나는 할머니가 시킨 일을 빈틈없이 해내려고 온 힘을 다했다. 내 머리통 세 개는 들어갈 만한 냄비를 혼자 씻으라 해도 불평하지 않았고, 밀대로 바닥 청소를 시키면 도자기 닦듯이 윤을 냈다. 그런데 누나는 달랐다. 성깔머리가 누구 명령을 들을 만하게 생겨먹지 못했다. 계란을 네 개 가져오라고 하면 일부러 하나 빼먹고 오는 심보가 어린 내 눈에도 훤히 보였다. 나는 그 꼴을 보면서 우리가 여기서도 쫓겨나면 끝장이라는 걸 서서히 실감했다.
“아니, 생긴 게 문제가 아니고, 진짜 두뇌에 좋대. 너는 인삼 공사에서 일하는 애가 그런 것도 모르니?”
“주택 공사.”
“아아, 하여튼.”
잠깐의 침묵 뒤 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통화를 마쳐야 할 것 같았다. 말을 더 나눠봤자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 없다는 사실만을, 누가 누구에게 의지할 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만을 확인하게 될 듯했다. 누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 요약해주었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은 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별 대책이 없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버지에게도 연락했는데, 결국 요양원에는 보내지 않기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성실하고 참한 간병인 ― 분명 아버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 을 고용해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조차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해나갈 예정이었다. 우리가 이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가고 나면 아버지는 멀리서 통화 몇 번으로 죄책감을 털어낼 테고, 누나는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전화가 오면 다 받을 것이며, 나는 우리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 터였다.
나는 전화를 끊은 뒤 가만히 앉아 슬픔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미묘하게 불쾌한 감정뿐이었다. 며칠이 지나 차를 몰고 할머니의 음식점에 갈 때에야 그게 의무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독촉해서 예정보다 빨리 반차까지 썼는데, 막상 저물녘에 도착하고 보니 동네에는 시간이 멈춰 있는 듯했다. 내가 양복을 입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 것이었다. 익숙한 골목에 차를 대고 바닷가를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어릴 적에 이곳을 혼자 걷던 매일 저녁이 그럴듯한 추억처럼 떠올랐다. 누나와 한방에서 자기 불편한 나이가 되면서 나는 혼자 1층으로 내려와 매트를 깔고 잤다. 방금 손님들이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던 자리에 드러누워 숙제를 하고 있으면, 2층에서는 누나와 할머니가 다투는 소리, 그러다가 간간이 함께 웃는 소리가 흘러내렸다. 언젠가 할머니는 누나와 내가 생긴 건 닮았는데 어째 성적표는 딴판이냐고 물은 적 있었다. 나는 잠자리가 달라서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하진 못한 것 같았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한 우등생,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한 게 그때부터였다. 책을 읽다가 2층의 웅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귀 기울이다 보면, 결국 사라진 아버지를 떠올리기 일쑤였고, 그 따위 생각이나 한다는 데 또 화가 치밀었다. 그는 우리를 맡겨놓은 지 5년 만에 얼굴을 비추었다.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인형을 들고 가게 문을 두드린 그에게 누나와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을까? 지난주에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태연히 어린이용 선물을 내밀던 그 모습은, 내가 줄곧 혐오하게 될 무책임한 인간의 표본으로 기억에 눌어붙었다. 그러니 마음을 잡고 가게에 들어섰을 때, 누나와 오랜만에 마주한 순간 나는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문득 신경 쓰였다. 모든 게 그대로여서일지도 몰랐다. 치매라는 말에 풍비박산 난 풍경을 상상했는지도 몰랐다. 바닥에는 밥그릇 파편이 널려 있고 벽에는 불그죽죽하게 자기 이름을……. 하지만 누나가 꾸며놓은 음식점 내부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호두는 사 왔는지?”
누나가 물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래도 개화기 다방이 연상될 만큼 외관이 고풍스러웠으나, 누나는 거기에 더해 내부를 파티 룸처럼 꾸며놓은 참이었다. 테이블도 다 어디로 치워놓고 중앙에 딱 하나만 남겨놓아서 이 공간이 처음으로 넓게 느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