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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Sep 18. 2023

단편소설_ 어쩌다가 부조리극 #2

“안 사 왔지? 그럴 줄 알았다.”


“치매에는 녹차가 좋아. 호두가 아니라.”


누나는 주방 데스크에서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는데, 내 말에 고개를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테이블로 걸어가 녹차가 담긴 봉투와 서류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았다. 다른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테이블에 팔을 얹었다.


“이 장식은 다 뭐야?”


“오늘 할머니 생일이야.”


“오늘이?”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일정을 확인해보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할머니 생일은 분명히 늦봄인데 지금은 초가을이었다. 누나는 장난치는 것처럼 내 행동을 지켜보며 코웃음 쳤다. 그러더니 방금 완성한 고깔모자를 들어 올리며 오늘 신나는 파티를 할 거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잡채뿐 아니라 소고기 스튜와 지중해식 디저트까지 곧 배달이 올 거라고 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위층에서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따라 느릿느릿 내려왔다. 중앙 테이블에서 볼 때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쭉 빼고 할머니의 행색을 살폈다. 낮잠에서 방금 깨어났는지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눈매는 부드러웠다. 약간 안심이 되었다. 저렇게 말끔한 사람은 치매에 걸렸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학교는 잘 다녀왔느냐고 물어왔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학교를……. 나는 누나를 쳐다보았으나, 누나는 어쩐지 미안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누나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석 달 전 부엌에서 처음으로 두부를 태워먹었다. 두부를 양념장에 조리고 있는 걸 잊어버리진 않았는데, 소금을 꺼내려고 찬장을 연 뒤 그대로 얼어버린 탓이었다. 초여름이었고, 벌써 관광객이 이 좁디좁은 음식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손님이 좀 빠진다 싶으면 딱 그만큼 새로 들어와 손을 들어 보였다. 누나는 웃는 낯으로 메뉴판을 가져다주면서도 내심 이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인근 바닷가를 관광지로 개발한다고 떠들썩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수영복에 셔츠만 걸치고 밥을 먹으러 오는 모습에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턱을 괴고 주방만 쳐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문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들 급하지? 그들이 주방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음식을 갖다준 뒤에도 몇몇이 이쪽을 쳐다보기에 시선을 힐끔 따라가보니, 그들은 주방 창문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께름칙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누나는 새로운 손님들이 왜 이토록 마음에 안 드는지 생각해보았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넋 놓고 바다를 향하는 그 눈빛들을 보면 묘하게 소름까지 돋았으니까. 일단 현실적인 불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근처 상가의 상인들은 임대료가 올라 고생이라고 했으나, 이 작은 건물은 오래전부터 할머니 소유였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어쩌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최근 여름마다 몰려오는 이 젊은 손님들은 분명히 다른 얼굴들이었으나, 옷차림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엇비슷한 색깔의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도 역시 비슷한 모양의 셔츠를 걸치고 비슷한 음식을 앞에 두고 이쪽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느 여행사의 광고 사진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은 자기들이 빠져나온 사진 속 세계를 그리워하는 듯도 했다. 누나는 그 풍경 속에서 평소처럼 일을 하느라 진이 빠졌다. 할머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두부조림에 소금 대신 설탕을 넣었을 때도 그저 정신이 사나운 탓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운 순간일 수도 있었다. 할머니가 없을 때 주방은 거대한 암호나 마찬가지라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 생일을 챙기느라 음식을 만들어봤으나, 재료를 도통 구분할 수 없어 한참 헤맸던 것이다. 할머니는 2층에 커튼을 늘어뜨려 공간을 구획한 것처럼 주방 집기와 향신료도 일관되게 정리해놓았는데, 참기름과 들기름이 서로 다른 모양 병에 담긴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같은 종류의 유리병을 여러 개 놓고 소분할 정도였다. 우리는 ‘저기 파란 뚜껑 병 좀 가져와라’는 식의 지휘에 익숙해 있던 터라, 스스로 재료를 찾다 보니 면이 금세 퍼져버렸다. 그해 할머니 생일은 공휴일에 겹친 날이었다. 우리가 큰소리친 탓에 큰맘 먹고 가게도 쉬었는데, 일생 딱 한 번의 기회마저 그렇게 날려버릴 뻔했다. 할머니가 평소 안 먹어본 음식에 도전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스타 재료를 올리브유에 볶으려다가 참기름을 들이부었으나, 아무래도 서양 음식은 우리 입맛에 안 맞는다며 농담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할머니가 나날이 이상해질 때 누나는 장사 걱정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식재료는 이제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지만, 요리의 미묘한 맛은 여전히 할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누나는 그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젊은 손님들은 너무 얌전해서 설탕 범벅된 두부를 먹고도 투덜거리지 않았으므로. 요리를 잘못하고 있음은 어떤 커플이 생선구이를 거의 다 남기고 일어났을 때 알게 되었다. 누나는 퍽퍽하게 식은 생선 살을 한 젓가락 떼어 먹은 뒤,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가게 문을 며칠 닫아야겠다고 할머니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때 할머니가 역정을 내며 한사코 반대했다면,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고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자 누나는 그 모든 일이 피곤해서 벌어진 것이라 여겼다. 우리가 생일을 챙긴 딱 하루만 빼면 할머니는 평생 주방을 떠난 적 없었으니까. 우리에게도 일을 시키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할머니가 모든 일의 중심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보호자 역할을 도맡았고, 누나가 중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워도 일단 집에만 돌아오면 아무 말 없이 간식을 내주었다.


누나는 할머니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휴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식점 문을 닫아걸고 누나가 식사 준비를 도맡는 나날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면 할머니가 곧 멀쩡해지리라 기대도 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이참에 죄책감을 털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누나는 착실히 가게 일을 돕는 손녀로 동네에 알려졌지만, 스무 살 직전까지만 해도 선량한 학생들이 마주치면 안 되는 얼굴의 대표격이었다. 훗날 해명하기로는 음식점에 개인 공간이 없어 밖으로 나돌다 애들과 어울렸을 뿐이라 했지만, 어쨌든 그 우정이 교복 소매에 핏방울이 튈 정도로 격렬했던 건 사실이었다. 누나는 그 시절을 퍽 죄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즉 이 휴가가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누나가 선의의 거짓말을 반복해온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휴일이니 손님 받을 필요가 없어요, 오늘은 제가 밥해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그 오늘이 10여 년 전 생일날과 닮았다는 사실은, 케이크 없이 촛불은 어떻게 부느냐며 할머니가 수줍게 웃었을 때 알게 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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