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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Sep 18. 2023

단편소설_ 피식자의 만찬 #1

담배를 왜 피우냐고 물으면, 보통 얼떨떨한 표정을 짓습니다. 흡연자끼리는 그런 걸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배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이유 없는 일로 가득합니다. 오랜 친구 앞에서 침묵해본 적 있습니까. 수다를 떨다가 한순간 입을 다무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사람 얼굴이 낯설어지는 데 십 초면 충분합니다. 문득 깨닫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내 인생에 중요하지만, 사실 꼭 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더미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에는 둘도 없는 사이였지만, 재회하기까지는 많은 우연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어 배우가 되었습니다. 운 좋게 드라마 주연을 맡았고, 그 역할이 많은 사랑을 받아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더미는 나를 잊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봤을지 모릅니다.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노려보았겠지요. 학창 시절의 악몽, 괴롭힘당하던 자신을 철저히 외면한 비겁자의 얼굴을.


우리는 지금 이 장소에서 세 번 만났습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이런 공간은 뭐라 불러야 하나. 가게를 차리라고 있는 공간이지만 아무도 장사하지 않는 곳. 창문에 크게 임대, 라고 적혀 있을 뿐 누구에게도 임대하지 않은 곳. 한때는 사람이 꽤 붐비는 술집이었겠지만 지금은 바닥이며 벽이 모두 새하얗습니다. 색깔이 있는 것은 우리가 깔고 앉은 나무 의자와 원형 테이블뿐입니다. 닫아놓은 통창 너머로 맞은편 건물 옥상이 보이지요. 을지로 골목에서 흔히 보이는 루프탑 술집입니다. 오늘도 옥상의 탁자 앞 젊은 취객들이 모여 술을 마십니다. 시끄러운 음악. 혹시 찾아올지 모르는 침묵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둔중한 베이스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신기합니다. 저 많은 사람이 각자 다른 화제로 떠드는데,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한 소리를 내며 웃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풍부한 게 아니라 사실 턱없이 단순한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난데없이 불러놓고 헛소리가 길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내 친구 중 한 명은 안경을 늘 끼고 다니는데요. 밖에서 안경을 벗으면 쑥스러움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흐릿해지고 익숙한 사람들이 낯설어지면, 하릴없이 불청객이 된 기분이니까요. 얼마 전부터 내가 그렇습니다. 계속 불청객 같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나 자신이 어떤 꼴일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지 알 수 없어요.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배우라는 인간이 그렇습니다. 연기를 연습하다 보면 마음속에 거울이 하나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타인처럼 지켜봅니다. 심드렁할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긴장할 때 어떻게 입술을 움직이는지, 기쁨을 억누를 때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런데 더미를 다시 만나고부터는 달라졌습니다. 거울이 없어진 겁니다. 갑자기 자기 모습을 볼 수 없어 불안한 기분, 남들은 결코 모를 것 같아 나는 또 억울합니다.


처음 연락받은 게 언제였더라. 백 일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우가 된 지 팔 년, 처음 드라마 주연을 맡아 방영되던 중이었습니다. 나는 이메일 주소를 어디서도 공개한 적 없는데 간혹 메일을 보내오는 팬들이 있었습니다. 익명의 메일은 그 사이 끼어 있었습니다. 오랜만, 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자신이 학창 시절에 심한 괴롭힘을 당했으며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괴롭힘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내가 드라마에 나와 정의로운 주인공이 되고, 그 모습으로 유명해지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희한하게도 내용은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공개 사과나 활동 중단을 요청하거나 하다못해 돈을 내놓으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답답한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살면서 누구도 괴롭히거나 때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떳떳하니 괜찮을 거라 위안하면서도,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누가 현관문을 두들긴 것처럼 놀라곤 했습니다.


소속사에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혼자 입술만 짓씹는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발신자가 더미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인생에 그런 친구가 있었음을 기억해낸 것이지요. 한번 떠올리니 그 시절 우리 모습이 줄줄이 펼쳐졌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기억합니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할까요. 더미는 중학생 때 괴롭힘당했는데, 아는 사람이 적은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 두루 친해지고 반장까지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더미의 과거를 아는,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깡패 같은 녀석이 다른 반에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얼룩이 묻은 옷은 잘도 빨아서 입으면서, 어려운 과거를 겪은 사람은 곁에 두지 않으려 하죠. 그 일진은 더미의 과거를 소문내지 않는 대가로 더미에게 남들 몰래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애들 물건을 훔쳐 오라거나 여자애들 연락처를 알아내라는 식, 심지어는 여자애들 사진을 몰래 찍어 오라고 시키기도 했습니다.


더미가 바란 대로, 그가 따돌림당하던 중학생 시절은 결국 소문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남들 모르게 일진의 심부름을 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유일한 목격자인 나를 더미가 기억하고 있었겠지요. 방관이 죄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와 방관자는 분명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당당한 마음으로 더미에게 답신했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안다고. 오해가 있는 듯하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더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주소와 만날 날짜, 시간이 적혀 있더군요. 혼자 오라는 말과 함께요. 그 순간부터 나는 더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됐는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주연이 되는 데 팔 년이 걸렸어요. 내 잘못도 아닌 과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카페나 술집, 음식점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미가 말한 공간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아무 이름도 없는, 아무 용도가 없는 이 새하얀 공간으로.     




그런데 정말 담배 안 피우십니까?     




아, 왜 존댓말을 쓰는지 궁금하신가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존댓말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연극 하던 시절에도 독백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무대에서 말입니다. 시선 처리가 중요하지요. 타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니까요. 다른 배우에게 하는 말도 아니고, 관객에게 하는 말도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배우나 관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건 도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독백은 연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에도 나래이션이 있지요.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 주인공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튀어나옵니다. 내가 맡은 역할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젊은 기간제 교사로 학생들 사이 갈등을 해결하고, 학교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의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당당히 목소리를 냅니다. 드라마에서 그는 허공에 일기를 쓰듯 독백합니다. 사회초년생으로서 경험한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막다른 길로 질주하는 학생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래서 잠들기 전마다 어떤 다짐을 하는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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