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의 꼬마 시절이 기억난다. 학교에 가기 전날 저녁이면 다음 날 시간표를 보고 필요한 교과서와 준비물을 완벽하게 챙긴 후 연필 다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아 필통에 넣고 두세 번을 더 확인하고현관문 앞에 빨간 책가방을 두고 잠을 잤다.준비물은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고 성실한 학교생활을 했다.
철저한 준비와 계획성이 몸에 배인 아이였지만 성적은 마음대로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언니는 달랐다.
언니는 학교를 다니며 단 한 번도 준비물을 가져간 적이 없었다. 늘 친구나 선생님께 빌렸다. 필통도 없었으며 어쩌다 샤프나 지우개가 필요하면 청소 시간에 빗자루 질을 해서 남이 떨어뜨린 걸 주워 썼다.
봉고차로 여러 명이 돈을 내고 등하교를 하던 풍습(?)이 우리 지역에 있었는데, 언니는 늘 아침에 도착하는 봉고차의 '빵빵!" 하는 클락션 소리에 깨 교복을 입고 학교엘 갔다.
나와 영 다른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언니는 늘 우등생이었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다국적 대기업에 입사, 따기 힘든 금융자격증까지 갖춘 고 스펙녀로 성장했다.
엄마는 성격과 성적이 비례관계가 아님을 우리 자매를 통해 알 수 있었다는 뼈를 때리는 증언을 가끔 하신다.
계획성 있고 준비가 철저하다고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여~
너희 둘을 보면 알 수 있지 그건~
진짜 기분 나쁜 말(엄마 미워!)이지만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과정이 아름답거나 최선을 다했으면 뭐 하나. 사실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난 후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영화 '메기스 플랜'은 똑똑한 남성의 정자를 제공받아 출산을 준비하는 메기의 계획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우연히 빠진 사랑으로 불행한 결혼 생활이 시작되고 주인공은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어느 계획도 메기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과 관계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주인공 메기를 보며, 삶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에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두 다 반듯하게 정해진 삶을 산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딱딱할지. 때론 힘들고 지친 우리의 삶도 사실
돌아보면 별것 아니기도 했다. 그땐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지 기억도 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미래를 걱정하며 아등바등 살아봤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천지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얼까 생각해 보니 '내가 제일 편안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그렇게 살며 얻은 것은 폭식 아니면 탈모, 위장병이었다.
어차피 매일 아침 출근해 일하고가족을 위해 애쓰는 건 기본적으로 깔린 우리의 의무 같은 것들이다. 이미 그 위대하고 대단한 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데 부러 다른 것에 연연하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다가오는 해는 내 인생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힘주기'를 줄이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나를 들볶지 않고 대충 흘러가는 대로 편안하게, 관계와 일들에 속속들이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한 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