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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Mar 15. 2021

이른 봄의 미나리

마음을 안아주는 생각들

너무 추운 겨울을 보냈다. 작년에는 입지도 않던 겨울 내의를 꺼내 입고 출근하며 내복과 거의 한 몸이 되어 지다. 퇴근해 옷을 갈아입을 땐 겹겹이 입은 옷들을 마치 허물을 벗듯 데, 이 되었지만 아침으론 쌀쌀한 바람이 남아있어 지긋지긋한 작년 겨울이 아직 가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막 8살이 되던 무렵, 삼 남매를 키우기가 버거웠던 엄마는 1월이 되자 나를 시골 친가에 맡겼다. 엄만 3월이 되면 데리러 올 테니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시골서 지내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별로 서운하진 않았다. 골엔 나가 놀 곳이 천지였고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할머니도 계셨기 때문이다.


눈이 정말 허리까지 펑펑 왔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지만 몰래 나가 손발이 꽁꽁 얼도록 눈사람을 만들었고 방학을 맞아 동네에 몰려든 나 같은 꼬마들과 모여 아궁이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코가 새카맣게 될 때까지 놀았다.

한날은, 아랫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호두를 열심히 망치로 깨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다가와 무릎이 다 헤진 내 내복을 보며 혀를 끌끌 차셨다.


"에휴, 내복 곧 구멍이 나게 생겼..."


그리고는 다음날, 마치 산타가 준 선물처럼 자고 일어나니 내 머리맡에 분홍빛의 예쁜 '보온메리'가 놓여있었다. 그 내의는 할머니가 내 닳은 내복을 보시곤 곧장 장으로 가 당신이 가을에 수확땅콩이며 호두를 팔아 사  귀한 내의였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미나리'를 보다 문득 윤여정 배우의 얼굴에 나의 할머니가 겹쳐 보였다. 손주와 자식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던 그 노력과 그것밖엔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하던 그 애로(隘路)를. 그리고 우리 할머니가 사주셨던 나의 핑크빛 내의까지도.


영화에서 등장하는 미나리는 한국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할머니가 무심히 뿌려놓아도 지천으로 자라난 개울가의 미나리처럼. 어디서든 잘 자라고 어느 요리에도 쓰이는 그 평범하고 맛 좋은 미나리는 마치 그때를 살아가던 어느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직은 찬바람이 스며드는 이른 봄, 파릇파릇한 미나리를 담은 영화를 보며 마음이 따스해졌다. 할머니가 사주었던 그 보온메리를 다시 만져보고 싶다가 시골집의 뜨끈한 아랫목 그리워는 날이었다.



사진/영화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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