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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Jan 28. 2022

유효기간


1.동수 이야기


"이름이 김동수요. 여기 온 적이 있다고 했어요."

"생년월일은요?"

"잠시만요. 적은 게 있었는데, 여깄네요. 20년 5월 5일생."

"아 네, 온 적 있네요. 데리고 오신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선생님입니다. 보육원."

"아…. 기록에는 작년에 엄마랑 함께 온 거로 되어있는데…."

"네, 맞아요. 근데 동수 부모님이 올해 초에 이혼하셨고 두 분 다 양육권을 포기하셔서 아이가 우리 기관으로 오게 됐어요. 요즘에 애가 자꾸 이가 아프다고 해서 치과에 데려가려고 물어봤더니 여기 온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군요…. 아휴. 참 안됐네요. 애가. 불쌍해라."


동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구 선생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와 마주 서 있는 병원 직원이 고개를 옆으로 빼고 동수를 쳐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와닿는 것을 느끼면서도 동수는 부러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제 곧 7살이 되는 어린아이지만,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습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너무나 불편했다. 그 눈에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하나 동수는 난감했다. 자신도 아직 이해가 가진 않는 상황에 대한 혼란은 가슴속에 조용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시시때때로 몰아치곤 했다.


자주 싸우던 엄마와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그래도 그들 사이에서 따스한 품과 일상을 보냈던 기억은 존재했으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가 오지 않았던 이유처럼, 착하게 굴지 않아서, 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써서. 그들이 자신을 떠난 것만 같아 괴로웠기 때문이다.


"이제, 엄마 아빠랑 함께 살 수 없어. 동수야.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내. 엄마가 가끔 너 보러 올게. 알았지? 여기서 선생님들 말 잘 듣고 있어. 이거 너 좋아하는 초콜릿인데 엄마 생각나면 하나씩 먹어."

동수는 헤어지던 날 엄마가 준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렸다. 물컹하고 다 녹은 초콜릿이 터져 동수의 손톱 사이로 스며들었다. 손을 꺼내 쳐다보았다. 진득한 초콜릿이 묻은 손을. 그건 초콜릿이 아니라 부모의 버림에 상처받아 녹아내린 동수의 심장인 것만 같이 보였다.


그렇게 너덜너덜한 심장을 갖고 동수는 열아홉이 되도록 버텨냈다. 보육원은 그런대로 살만했다. 집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됐고, 배를 곯는 날도 이젠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기억은 공중에 날아간 연기처럼 다 흩어져 버렸지만, 몇몇 장면만은 그대로 동수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부모라는 사람들의 기분과 사이가 드물게 좋았던 어느 날, 세 식구가 함께 놀이동산에 갔던 기억도 있었고 둘 다 집에 들어오지 않던 어느 날 무섭도록 컴컴한 방에 혼자 누워 베개를 꼭 끌어안고 티브이만 보던 기억도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두 번 정도 찾아오긴 했었다. 자신이 입을 점퍼를 하나 사 오기도 했고 보육원에서도 잘 먹을 수 있는 것은 몰랐는지 과자를 몇 봉지 가져왔던 기억도 있었다. 해를 넘기며 엄마도 발길을 끊었고 이제 연락조차 되지 않아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엄마의 코를 찌르던 향수 냄새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그리움이나 정의 향기는 아니었다. 그냥 엄마였던 사람의 냄새. 그 냄새가 기억나는 것뿐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특별히 왕따를 당하거나 힘든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행복하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새 학기가 되면 으레 그렇듯, 앞이나 옆줄에 앉은 누군가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아, 그 보육원에 산다는 애?'라는 말이 들리는 듯한 눈빛을 했다. 매년 있는 통과의례처럼 동수도 그 순간을 지나기만 하면 됐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했던 고마운 친구도 있었지만, 등하교를 짝지어 오가야 하는 보육원 생활을 하는 동수에게는 아쉽지만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브랜드의 패딩 같은 것은 부러운 대상도 아니었다. 동수 자신이 부러워하는 것, 돌아갈 집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그 사실이 가장 부러운 것이었다. 동시에 동수가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언제 죽더라도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옆 반의 누군가가 방학 때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있었는데 장례를 마치고 운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것을 보고 동수는 그 아이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저런 장례조차 허락되지 않겠지, 내가 죽는다고 해서 누군가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보육원 선생님들이나 동생들이 좀 슬퍼하긴 하겠지만,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만큼은 아니겠지라고.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데 동수야. 여기 생활관으로 당분간 옮겨 살 수는 있지만, 곧 나가야 하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보육원 사무장님이 동수를 불렀다. 동수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면 자립 정착금을 받고 나가야 한다. 날짜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담담하고 매우 조용하게. 동수는 늘 그래 왔듯 혼자서 착실히 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같은 반 친구가 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음 주부터 이어받아할 생각이었고 그렇게 일하며 돈을 모아가면 어찌어찌 살아갈 수는 있을 것도 같다는 눈곱만 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대학은 수시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상태긴 했다. 등록금은 그동안 지원계좌에 모아두었던 돈과 장학금으로 해결은 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생활하고 돈도 모으고 학교도 다닌다는 그 엄청난 것들을 잘할 수 있을까, 마치 눈앞에 옅은 안개가 낀 것 같기도 했고 저 멀리서 흐릿하고도 노란 불빛 하나가 보이는 듯도 했다.


편의점 일은 그런대로 할만했다. 보육원에서 동수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을 돌보거나 생활관을 치우는 일도 하며 오랜 기간 지냈던 탓에 일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가끔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자가 욕을 했고 근처를 배회하는 부랑자가 들어와 음식을 훔쳐가는 것만 아니면 괜찮았다. 점장은 삼십 대 중반의 여자였다.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에 아주 작은 얼굴을 가진 사람. 포켓몬에 나오는 우람한 동물 같은, 그러나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깨나 인정도 좋아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늘 본인이 가져가며 동수의 것도 몇 개씩 남겨주었다. 모르긴 해도, 사장 자신의 삶도 그리 넉넉하진 않을 것이라고 동수는 생각했다.


낡고 양쪽 뒷굽이 납작하게 닿은 그녀의 운동화는 동수 자신의 것과 닮아있었다. 어떤 사연을 갖고 미혼 여성이 편의점을 운영하는 것인지 자주 오가는 손님 중 특히 50대가 넘은 아줌마들이 가끔 물어왔으나 동수 자신은 아는 것이 없었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엔, 자신의 삶 자체가 너무 팍팍했다.


그날은 동수의 생일이었다. 딱 스무 해가 되는. 누군가에겐 스물이란 글자가 매우 설레고 행복하고 기대감을 잔뜩 품게 하는 단어일지 모르지만, 동수는 거의 평범한 모든 것에 해당 사항이 없듯 이번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어제는 원장님과 함께 보육원에서 청년 생활관으로 짐을 옮겼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 수는 있으려나 앞길이 막막했고, 그에 앞서 대학을 한 학기라도 다닐 수 있을지도 막막했다.


불편한 스무 살의 생일 근무를 마친 동수는 편의점을 나와 시린 2월의 말의 바람을 맞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정류장도 텅 비어 보였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차가운 정류장의 벤치에 동수가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한 10분 정도 남았다는 표시가 정류장 전광판에 지나갔다. 동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따뜻한 삼각김밥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손을 빼는 순간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삼각김밥을 잡다 바닥에 누군가 흘린 카드 한 장을 보았다.


짙은 녹색의 카드는 어느 회사의 카드인지 뭐라 쓰여 있는 것이 없었고 다른 신용카드나 체크카드와 모양만 같았다. IC칩과 안쪽의 마그네틱 부분은 금색이었다. 편의점에서 근무하며 보았던 여느 카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카드였다. 동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누군가 이 카드를 찾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해서다. 그러나 정류장과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이름과 유효기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영문으로' MYEONGSOOKKIM' 김명숙이었고 유효기간 날짜는 02/24라고 쓰여있었다.


동수는 문득 자신에게도 이런 카드가 한 장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결제는 부모가 자동이체를 걸어놓은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불가능한 상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정류장에서 흘러나왔다. 동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카드를 그대로 놓고 가면 될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갔다가 우체통 같은 데에 넣어 버릴까. 그러다 왠지 끌리는 어떤 느낌에, 동수는 그냥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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