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팥 Feb 03. 2022

유효기간

2.주인 없는 카드


한 며칠, 동수는 카드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느껴지는 차갑고 딱딱한 그 카드를, 동수는 늦은 밤, 같은 정류장에 앉아 꺼내어 만져보다가 영훈이의 카드가 생각이 났다.

"맞아, 나 오늘 학원비 결제하러 엄마 카드 가져왔는데 우리 이걸로 오늘 치킨이나 먹자."

친구 영훈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때 엄마 카드로 사주었던 치킨을, 동수는 잊지 못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밖에서 사 먹었던 외식. 막 튀겨져 나온 치킨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동수는 벅차오르는 감격이란 무엇인지 처음 느꼈다. 영훈이가 다리 하나를 입에 넣으며 나머지 하나를 손에 들고 동수에게 건넸다. 처음 먹어보는 치킨 다리였다. 보육원에서도 가끔 후원 업체에서 보내는 치킨을 먹어봤지만, 다리는 늘 어린 동생들 차지였다. 그리고 모두 한낮에 배달되어 눅눅한 것들뿐이었다. 저녁 무렵, 동수가 하교 후 먹던 그 남은 치킨은 그저 배를 채울 용도밖엔 되지 않았다.


치킨을 다 먹고 영훈이가 결제하던 엄마의 카드. 그 카드는 마치 부모가 쥐여 준 칼이나 방패 같다고 동수는 생각했다. 나에게도 저런 카드가 있었으면, 배고플 때 빵을 사 먹고 추울 때 따스한 걸 입에 넣어 줄 관심이란 것이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휑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동수는 주머니에 있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카드가 정말 내 것이라면. 내가 언제라도 돈이 떨어지거나 무언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면.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고는 동수는 피식 웃었다. 더 어린애도 아닌데, 아직도 이런 상상을 할 여유가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나 싶어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3월의 첫 강의실은 무척 썰렁했다. 새내기라 불리는 같은 과 아이들은 누가 봐도 새로 사 입은 것 같은 점퍼를 걸치고 학교에 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입었던 동수의 검은색 긴 패딩은 그 속에서 오히려 낯설었다. 의류 업체에서 단체로 기증한 넉넉한 품의 외투는 가뜩이나 마른 동수를 더 마르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나마 이거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추운 겨울을 나야 했을까. 동수는 외투를 입을 때마다 자신에게 공짜로 주어진 감사함과 맞지 않는 옷의 어색함을 늘 함께 입어야만 했다.


"안녕! 난 젤라야. 안젤라. 너 이름은 뭐야?"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먼저 동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난…. 이동수. 근데 너 성당 다녀?"

"어? 맞아. 잘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알아보네. 내 세례명이기도 하고 이름이기도 해. 너도 성당 다니니?"

"아니. 그냥…. 그럴 거 같아서."

"똑똑하구나! 너!"


젤라에겐 모른 척했지만, 동수는 알고 있었다. 보육원 옆에 있는 성당을 다니며 동시에 성당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던 아이가 그 이름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동수가 알던 안젤라 수녀님은 매우 엄격하고 절대 웃지 않는 백발의 마녀 같은 모습이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천사같이 웃을 수도 있다니, 신기했다.


"우리, 오늘 학교 식당 말고 저 아래 짬뽕집 가서 짬뽕 안 먹을래? 거기 오려고 우리 학교 다닌다는 애들도 많이 있대. 웃기지?"

"아, 그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던가. 동수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대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아무도 내가 보육원에 산다는 것을 모르다니. 매년 새 학기가 될 때 날 쳐다보던 그 어색한 눈동자들이 사라진 곳에서의 대접은 황송했다.


젤라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 교정을 걸었다. 중국집으로 가는 가깝지 않은 그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길이라 해도 동수는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근데…. 나에게 짬뽕값이 있었던가? 젤라의 밥값까지 내가 내고 다음엔 젤라더러 사라고 하면 좀 이상할까? 동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너덜너덜한 자신의 지갑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안주머니, 바깥 주머니, 바지 뒷주머니 어디에도 지갑이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 올 때만 해도 분명 있었는데.


동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둘은 중국집에 앉아 짬뽕을 마주하고 있었다. 젤라는 하얀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빨간 짬뽕 국물을 떠먹으며 세상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동수는 자신에게 천 원 한 장 없다는 사실을 깜빡 잊을 뻔했다.


'그래, 일단 먹고 이따가 지갑이 없어졌는데 젤라에게 대신 내달라고 하고 다음에 내가 내자. 하. 근데 어쩌나. 교통카드도 없으니 집에는 어떻게 가지. 강의실에 가서 다시 찾아봐야겠다. 의자 아래 떨어졌는지.'


짬뽕을 다 먹고 동수와 젤라는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그때 일어서며 젤라가 말했다.


"참, 나 가방을 강의실에 두고 왔는데, 내 것 같이 계산해 주라. 가서 줄게. 아니면 앱으로 지금 송금해줄까?"

동수는 눈앞이 어질 했다. 송금이 문제가 아니야 젤라야, 우린 지금 둘 다 빈털터리라고. 그사이 둘은 어느덧 계산대 앞에 섰다. 주인아저씨가 '만 이천 원.' 하고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동수에겐 아저씨의 입 모양만 보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손을 만지작거리다, 주운 카드가 손에 잡혔다. 일단 이거라도 내자. 뭐 어쩌겠어. 하는 말도 안 되는 결심이 확고히 동수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아저씨가 카드를 받았다. 드르륵. 기계에서 계산되는 소리가 들렸다.'가자.' 젤라가 동수의 옷소매를 끌었다. 신기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동수의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살랑살랑 떨려왔다. 이제 난 전과자가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젤라가 예쁜 입으로 조잘대는 소리도 들려와 마음이 더 떨렸다.

동수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돈이 없다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전화할 사람이나 데리러 올 보호자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한 번 더 카드를 쓰기로 했다. 만일 경찰이 보육원에 찾아오거나 학교에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불쌍한 동수 자신을 위해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대학 등교의 첫날이었고 어쩌면 한 학기만 다니고 더는 다니지도 못할 곳에서의 하루를 망치기는 싫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정체불명의 카드를 썼다고 동수를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다행이면서도 신기했다. 하늘에서 천사가 있다면, 날 지켜보다가 한번 도와줬던 것은 아닐까? 동수는 또 한심한 생각을 했다.


"네가 뭐 불쌍해, 넌 대단해. 다른 아이들이 부모 도움으로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요즘에, 너는 혼자 힘으로도 엄청 잘 해내고 있잖아. 동수야, 넌 대단한 아이야."


수시를 포기하겠다는 동수에게 고3 담임 유정이 보냈던 문자를 동수는 가끔 보며 생각했다. 아니라고, 선생님이 틀렸다고. 자신은 불쌍한 아이가 맞는다는 생각을. 누군가 힘이 되는 말을 해 주었을 때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한심한 바보들'이란 마음이 들었다. 안락함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휘휘 날아가는 기분 좋은 위로가 할 수 있겠지. 대단한 아이? 엄청 잘 해낸다고? 아니,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니까 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사는 거지, 깔끔하게 죽을 용기는 없으니까.


동수는 언젠가 죽겠다며 보육원 부엌에서 부탄가스를 잔뜩 마시고는 바보까지 되어버린 홍주를 기억했다. 죽을 용기는 있었지만, 바보가 될 줄 몰랐겠지. 한심한 놈. 우리 같은 한심한 놈들은 그래서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라고 남들이 욕하는 거야 새끼야. 바보가 되어 침을 질질 흘리며 나타난 홍주를 볼 때마다 동수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 운 나쁜 놈들은 죽음까지 운이 안 따라주는 거구나.


그래서 동수는 이제 카드를 마구 써보기로 했다. 어차피 누구도 찾지 않는 카드, 내가 좀 쓰다가 찾아오면 뭐. 감옥에나 가는 거지. 착하게 도덕을 지키고 살다 혼자 쓸쓸히 굶어 죽거나 남들처럼 조금이라도 살아보다 감옥에 가나 어차피 비슷한 거 아니겠어? 동수의 마음속에 작은 검은 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 검은 꽃은 순식간에 만개했다. 다른 악의 모든 것들의 시작이 그러했듯.


사람들이 말하는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걸, 동수는 정체불명의 카드를 써보며 알 수 있었다. 매일 학교에 가며 그 카드를 사용했다. 버스에 오를 때도 찍고, 점심을 먹고도 긁었다. 자신이 편의점에서 번 돈으로 학식을 사 먹는 날도 있었지만, 같은 과 친구들이 가는 햄버거집이나 중국집에도 함께 가 카드로 그것들을 사 먹었다. 정말이지 신나는 일이었다. 식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의지로 음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동수에겐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유효기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