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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Mar 21. 2022

페페

5. 은정


오늘은 도서관에 사람이 많이 없는 날이었다. 창밖으로 11월의 오후 햇살이 쏟아졌다. 창문에 놓아둔 페페 잎이 마르는 것 같아 수윤은 신경이 쓰였다. 동전 모양의 식물인 페페는 물을 좋아했다. 수윤은 일회용 커피 컵에 물을 받아 페페를 키웠다. 원래 페페는 1층 도서관의 로비에서 누군가 키우는 것 같은 식물이었다. 도서관 입구 안내대와 도서 반납기 사이에 작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동전 모양의 잎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화분이 있었고, 도서관을 지나치는 누구도 그 화분을 신경 쓰거나 보는 이는 없었다. 어느 날 수윤은 그 화분에서 아주 작은 싹이 옆구리 쪽을 비집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조그맣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뾰족하게 나온 싹 하나를 둘러싸고 다른 동그란 모양의 잎이 아주 위태롭게 잎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면 한 잎 잘라 줄 테니까 가지고 올라가서 키우든지.”     


페페를 들여다보고 있는 수윤의 뒤에서 청소 아줌마가 말을 건넸다.      


“그래도 돼요?”     

“응. 맨날 여기서 이거 들여다보고 있더구먼. 가져가.”     

“물은 얼마에 한 번 갈아줄까요?”     

“몰라 나도. 그냥 갈아줘야겠다 싶을 때.”     

“그게 보여요?”     

“보이지. 키우다 보면.”     


수윤은 그날부터 페페를 가지고 올라가 자신의 책상 위에 두고 새로 나는 페페의 싹을 보았다. 하루는 머리를 내민 모습을, 하루는 옆 날개를 펼칠 준비를 하는 모습을. 페페는 아줌마 말대로 정말 이틀 정도 지나니 뿌리를 둘러싼 물이 마치 고체가 되어가는 듯 탁한 투명색이 되었다. 수윤은 자신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페페를 정답다고 여기며, 사랑했던 서희를 보던 눈빛을 하고 쳐다보았다.


망할 놈의 햇살. 건조한 날씨. 이곳이 영국이라면 좋으련만. 아니면 지중해 바다 어느 곳이거나. 안개가 잔뜩 끼어있는 날과 장마철이 일 년 내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조함이 늘어나는 가을이 수윤은 싫었다. 오후 3시가 되자 그 남자가 도서관으로 또 들어왔다. 지난번 기소 수영장을 다니느냐고 물어보았던 남자다. 수윤은 남자의 뒤통수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다른 이용자들의 도서 바코드를 찍으며 한쪽 눈을 은밀하게 그 남자 쪽으로 굴렸다. 짙은 블루진에 검정 배낭을 멘 남자는 가방 지퍼에 열쇠고리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수영장 카드도 함께 달린 것이 보였다. 기소 수영장의 것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시나?”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은정 언니였다. 수영장 마스터 반을 같이 다니는 언니였다. 언니는 가끔 도서관에 와서 수윤을 만난다. 수윤이 가장 좋아하는 이온 음료를 사 와서.


“언니, 저 사람 수영장에서 봤던 거 기억나? 노란 팬티.”

“아. 그 버터플라이?”

“응. 도서관에 출입한 지 꽤 된 거 같은데, 인제 와서 나한테 아는 척을 하네.”

“그래서, 너도 인사했어?”

“아니. 나 수영 못한다고 했어.”

“잘했네. 뭐하러 물의 인연을 뭍으로까지 끌고 오시나. 그건 한 놈이면 족하지.”

“그럼, 우린?”

“우린. 인어들이잖아.”     


 은정은 수윤에게 이온 음료를 주고는 책을 한 권 빌려서 나갔다. 은정이 보는 책들은 늘 한정적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들. 은정은 탐정소설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게 재밌어? 난 모르겠더라.”

“야, 인생이 이렇게 다 속고 속이는 거잖아. 여기에 다 있다고. 치정, 연민 분노. 난 그런 게 좋아.”


수영한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수윤이 수영장에서 생리 끝물 무렵 다리 사이로 피를 한 방울 흘렸을 때, 옆에서 샤워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샤워기로 수윤의 다리 사이의 피를 씻어 내주던 은정과의 인연. 새벽반과 저녁반의 수영 강습에서도 늘 함께하다 보니 수윤과 은정은 어느새 자매처럼 친해졌다. 수윤이 은정과 남다른 친분을 쌓는 것은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는 늘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많이 불편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조금만 친해지면 가족관계, 취미, 외모 등에 대해 훈수를 두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입을 벌려 자신의 정보들에 대한 낱말을 늘어놓는 것을 수윤은 지독히 싫어했다.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그냥 통하면 안 되는 걸까. 서로를 알기 위해 꼬치꼬치 캐고 묻고 대답하는 그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도 피로하고 지루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쉬이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리거나 단편적인 부분만을 놓고 수윤을 판단해 버리기도 했다. 아빠와 둘이 살았다고 하면 눈빛이 애잔하게 바뀌기도 했으며, 하루 두 번씩 수영을 다닌다고 하면 힘들지 않냐고 왜 그렇게 하냐고 참견을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럼 뭘 먹고 사느냐고 반문했고 습진이 생긴 손 발가락을 보며 혀를 차기도 했다.


은정은 그런 면에서 좀 다른 사람이었다. ‘아빠랑 둘이 살아요.’라는 말을 했을 땐 ‘외롭지 않아 좋겠다. 나는 혼자 사는데.'라고 대답했으며 하루 두 번 수영한다고 했을 땐, '더 하고 싶지 않니?'라고 반문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을 땐, 자신은 '그렇구나. 난 과일을 싫어하는데.'라고 말했다. 은정이라는 이 여자가 모든 면에서 자신과 참 잘 맞는 사람이라고 수윤은 생각했다.

은정이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가져다주는 이온 음료를 수윤은 특별하게 생각했다. 네임펜으로 이온 음료에 은정이 가져다준 날짜를 써 놓고는 다섯 개가 쌓이면 한 개를 꺼내 먹었다. 그녀에게 있어 은정이 주는 이온 음료는 마음의 통장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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