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낮 동안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방 안에서 줄담배를 태웠고 엄마는 그 옆에 죄인처럼 앉아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가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엄마는 은지를 맡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했다. 아이를 맡기고 다녔던 은지 엄마를 좀 더 말리지 않았던 것이 엄마 스스로 후회가 밀려와 용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빠는 '그렇다고 엄동설한에 애를 밖에다 내버릴 수도 없지' 하고는 담배를 비벼 껐다. 사람만 좋고 무책임했던 아빠의 성격다운 결정이었다.
다음 날. 엄마는 경찰서에 또 다녀왔다. 도저히 은지 엄마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으니 엄마 스스로 은지를 안전한 곳에 맡겨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때, 은지가 자신이 어디론가 보내진 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어쩌면 은지는 자신이 믿었던 어른들, 시연이 언니와 내가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은지 엄마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은지가 갈 보육원을 알아보던 그날부터 은지는 이상하게 더 밝아지고 말을 잘하길 시작했다. 밥도 잘 먹었다. 총각김치를 물에 씻어 젓가락에 푹 키워주면 그것을 쭉쭉 빨고 사근사근 씹어 먹으며 흰 밥과 함께 은지는 밥을 먹었다. 아기라면 어른 밥공기에 덮어 있는 달걀부침을 탐낼 줄도 알았을 텐데, 은지는 이미 아기가 아니었다. 가여운 그 아이는 그저 김치만 쭉쭉 빨며 좁은 개다리 나무 상 한구석을 지키는 것만으로 꼭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같았다.
며칠 뒤, 집으로 경찰 두 명이 보육원 사람과 함께 찾아왔다. 집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자 나는 은지의 손을 잡고 언니 뒤로 숨어 섰다. 은지 엄마는 나타나지 않으니 일단 아이를 미아로 처리하여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언니가 울먹울먹 하다가 눈물을 먼저 뚝뚝 떨어트렸다. 엄마는 '얘들이 왜 이래, 저리 안 비켜?' 하며 언니 뒤에 선 은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은지는 내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고 언니가 엄마 앞을 가로막으며 은지를 감싸 안았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이산가족 상봉 후 이별의 한 장면처럼 애처로운 장면이 열 세평 우리 집 작은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십여 분 실랑이를 하다가 엄마도 마음이 약해졌는지 그만 방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엄마도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빠의 적은 월급과 세 명의 아이, 시골에 매달 부쳐야 하는 할아버지의 생활비와 아빠의 동생들에 짓눌린 삶이 엄마를 억척스럽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아이는 며칠 내로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단 말을 하고 낯선 방문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들과 엄마까지 다 나가고 난 뒤 언니와 나, 은지는 방에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셋이 누워 낮잠을 잤다. 정말 곤하게 잔 낮잠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자고 일어나 보니 은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방에도 화장실에도, 베란다에도. 언니와 나는 놀이터와 시장에도 나가 은지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옥수수 파는 아줌마와 호떡 파는 아저씨도 아이를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미 날은 7시가 넘어 어두워졌고 해는 떨어진 뒤였다. 저녁 내내 은지를 찾으러 다녔더니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었다.
“언니, 나 배고픈데.”
언니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꺼냈다. 그때, 엄마가 은지의 손을 잡고 오빠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은지는 시장의 아동복 가게에 걸려있던 예쁜 분홍 점퍼를 입고 한 손에 커다란 사탕을 들고 나타났다. 엄마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들어와 손을 씻고 언니를 부엌에서 밀어내더니 물이 끓기 시작한 냄비에 라면을 넣었다. 오빠는 은지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 은지를 무릎에 앉히고는 같이 가요 톱 10을 보기 시작했다. 주현미가 나와 간드러진 목소리로 보조개를 접으며 노래를 불렀다. 화를 내지 않는 엄마와 오랜만에 친절한 오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라면을 호로록거리며 먹었다. 엄마는 왜 은지에게 옷을 사 입혔을까, 관심 없던 오빠는 왜 은지를 데리고 앉혔을까, 불안한 기운이 뜨거운 라면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나는 밤이었다.
이미 낮잠을 거하게 자고 난 터라 언니와 나, 은지는 셋이 누워 12시가 넘도록 라디오를 켜놓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끝난 지가 오래였다. 그러다 얼핏 잠결이었는지 꿈결이었는지 난 분명, 언니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었던 것 같았다. 언니는 흑흑하다가 또 웃기도 하고 잘됐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종일 불안을 껴안고 있었던 내가 그 소리를 듣고도 쉽사리 잠에서 깨어나지는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은지는 우리 집에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슬퍼하지 않았다. 간밤의 그 기억인지 꿈인지는 뭐였을까. 언니는 이제 괜찮다고, 은지 엄마가 간밤에 은지를 데려갔다고 했다. 나쁜 년, 그렇게 우리 집을 헤집어놓고. 은지 엄마 년은 진짜 나쁜 년이야. 생전 하지 않던 욕이 언니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친엄마가 데려갔다고 하니 우리 집엔 그보다 더 잘된 일은 없었다. 엄마는 홀가분했고 언니와 나만 조금 허탈할 뿐이었다.
“그때, 언니 기억나? 은지 엄마가 은지 데려가던 날.”
“쳐 죽일 년. 그년 얘기는 왜 꺼내? 오늘은 중요한 날이야. 너 서류는 다 챙겨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