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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Sep 02. 2020

무궁화와 나

우리 좋은 마음만 해요

어렸을 때 살던 집 앞에 이맘때면 항상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곤 했다. 무궁화는 꽃이 질 때 잎이 하나하나 떨어져서 예쁘지가 않고 화단 바닥이 지저분하다고 우리 엄마는 무궁화를 싫어다.

그 무궁화를 심은 사람은 우리 앞집 101호 할머니였데, 괴팍하던 성정의 할머니는 사실은 알고 보면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었다. 그 집 현관문에 '독립 유공자의 집' 푯말이 붙어있서, 누구라도 처음으로 1층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꼭 그 푯말을 멈추어 보았다. 와. 여기에 독립운동가가 산다고? 하는 신기함과 경외감을 가지고 말이다.


근데, 독립운동을 했다던 할머니는 목소리가 무지 컸고, 함께 사는 노총각 아들과 싸우는 일이 잦았고, 동네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기대했던 것은 매우 자애롭다거나 인자한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마치 목사님이나 스님에게 청렴과 자애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하지만  할머니는 리의 기대와는 매우 다른 분이었다.


망구. 또 인사를 안 받아.


솔직히 그 할머니 못지않게 까칠했던 우리 엄마는 종종 자신의 인사를 무시하는 그 할머니를 욕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는 할머니에게도 인사를 받지 않는 사정 있었다. 우리 집 아빠가 자주 초대하는 회사 사람들로 북적거려 워낙 시끄러울 때도 많았고, 특히 봄이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우리 엄마가 연례행사로 치르는 간장을 달이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다.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면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사는 새댁 리 집에 맨발로 내려와,


아줌마! 올해도 또 간장 달이지!

냄새 나 죽겠어.  이사 갈래요!


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는데, 바로 앞집에 사는 그 할머니는 오죽하셨으랴.  기억에도 그 냄새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무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오빠도 교복에 냄새가 베어 학교가 못 갈 지경이라고 울상을 지었을까.  같은 세상이면 아마 우리 엄마는 아파트에서 강제퇴거 명령을 받았을 그런 냄새였다. 엄마 또한 앞집 할머니 못지않게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옆집에 붙어살게 되었으니 충돌은 예상되는 일이었고 급기야, 그 도화선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요즘의 쿠킹클래스처럼 요리강습을 빙자한 냄비 방문판매가 유행이던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던 냄비 장사가 우리 집에서 동네 젊은 엄마들과 요리강습을 했고,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 엄마와 그 할머니는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아주 나빠졌다.

엄마야 당연히 젊은 여자들의 모임에 늙은 할머니를 끼워주고 싶지 않았겠으나,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자신도 앞집에 사는 당연한 권리로 요리강습에 초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마음이 상해버린 할머니는 엄마에게 싹수가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엄마는 할머니의 서슬 퍼런 타박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집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은 이 재미있는 광경에 다들 구경이 신이 났다. 여름밤의 싸움은 그렇게 앞집 할머니의 압승으로 끝이 났지만, 이후로화를 풀지 않는 할머니는 내가 인사를 해도 받지를 않으셔서 어린 마음에 집 앞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냅다 하고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런데 살벌한 인사의 눈치게임이 벌어지던 날들이 이어지다가 문득 앞집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우셨다. 할머니는,


너, 내 훈장 본 적 없지?

보여줄까?


하며 나를 당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금빛의 무궁화 훈장을 보여주셨다.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데 할머니가 이제 다 봤으면 너네 집에 가라고 또 쌀쌀맞게 말하여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머쓱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오빠랑 언니랑 커서 어렸을 적 얘기를 하다 보니 자기들도 그 집에 들어가서 한 번씩 그 훈장을 보았다고 했고 나처럼 끝은 머쓱했단다. 근데 왜 그땐 서로 그게 비밀 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매년 무궁화를 보면 그 할머니를 떠올린다. 이웃에게 사랑받는 이웃은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세계가 있던 할머니였다. 요즘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해하자면 자신에게 피해를 주거나 서운하게 만든 사람과는 손절하는 그런 스타일? 하지만, 어쩌면 할머니는 뒤에서 험담만 늘어놓으며 남을 탓하거나 욕하는 분은 절대 아니었을 것 같다. 직진녀라 불러드리는 것이 맞을까. 누구도 자신이 정한 예의에 벗어나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으니. 하긴 그러니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도 하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무궁화를 볼 때마다 난 내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고집'을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당당할 고집. 내 멋대로 산다는 확고한 의지.


무궁화가 피어있던 자리는 이제 없다. 우리가 살던 5층 아파트는 재건축이 되어 25층 아파트가 되었고 102호 삼 남매 집은 1102호가 되었다. 앞집에 사는 무서운 할머니를 피해 다니던, 40대 젊었던 우리 엄마는 70대 중반을 바라본다. 엄마는 이제 그 할머니를 이해할까?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나이가 들었다고 남들에게 수그리지 않고 싶었던 그 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이제 40대가 되어보니 그때의 엄마를 조금 이해할 것도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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