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의 발목
재직중일 때와 퇴사 후의 가장 큰 차이는 밤에 잠시 깼을 때 퇴사후는 더이상 잠못들까 걱정 없이 야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은퇴 직후엔 출근도 안하지 당분간 실업급여 나오지, 용돈 받고 쉬는 느낌 나서 매우 행복했다.
드디어 탈출했다는 행복감도 있었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면 의도하든 하지 않든 구직활동을 하고 이력서를 넣는다. 장기적인 취업을 희망하지 않아 몇군데 면접도 보면서 단기계약만 하겠다는 건방진 멘트도 날렸다. 나는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한 말이지만 아무리 단기를 원해도 해서는 안될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간 고용센터에서는 나를 돈 뜯어먹는 세금 포탈자마냥 대했다. 그곳의 직원들은 대부분 몹시 화나 있었고 내가 무슨 빚받으러 온 반갑지 않은 사람 마냥 대했는데 '나는 고용보험을 수십년간 열심히 낸 납세자인데 왜 나를 이렇게 대할까?'하고 의아했다.
6개월이나 1년씩 일하다 쉬다 하며 실업급여 체리피커들이 많다는 뉴스는 봤지만 나는 적어도 그에 해당되지 않는데 직원들이 한결같이 나이가 많고 짜증스럽게 응대해서 놀라웠다. 격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관두고 나처럼 실업급여를 받으시는 건 어떠신지 권하고 싶었지만 물론 참았다.
이제 더이상 출근해야 하는 사무실이 있던 서울에 거주할 필요도 없고 생활비 비싼 서울이 아니라 당장 물가싼 나라로 나가고 싶었지만, 10년 이상 재직이라 240일, 약 8개월은 실업급여 신청일에 국내 체류해야 해서 해외로는 단기만 나갈 수 있었다.
한국어 교원자격시험
1차 시험은 은퇴 직전 응시했고, 이후 2차 면접을 통과해 23년 초에 자격을 부여받았다.
1차 시험은 그냥 교재 당근에서 구해서 공부했고, 2차 면접 준비를 위해 스터디에 들어갔는데 멤버 중 한명이 조금 이상해 막판에 와해되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덕에 합격 기준 점수보다 널널하게 초과해 조금 덜 열공할 걸 그랬나 하는 오만한 생각도 해보았다.
은퇴 후 자봉용으로 취득한 자격증이기는 하나 백수도 되었고 자격증을 활용해볼까 시도했으나 한국어교사는 국내 공급 폭발에 낮은 시급에 생계유지가 힘들고 해외에서는 이런 자격증이 있는지도 몰라서 당장의 쓸모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국내에 한국어나 국어 박사 석사 널렸고 3급 자격을으로는 경력인정 가능한 자봉 기회마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모 구청 가족센터에서 한국어 교사 자원봉사
백수가 되자마자 NGO나 구청가족센터 들에 이러저러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다수의 이메일을 보냈고, 딱 한군데 회신이 왔다.
가족센터의 한국이민자 대상 한국어교실의 프리스쿨 같은 클래스였다. 비록 한달이었지만 내 생애 과외든 무슨 수업에서 애들을 가르치며 다수의 학생이 숙제를 해오는 것을 처음 보았다. 급 한국 와서 적응해야 하는 학생들은 아기를 안고 수업에 오기도 했고 절실함 때문인지 열심히 참여하여 가르치는 나도 기운이 났다.
나는 더 장기로 수업을 할 의사가 있었지만 담당자가 하루 전에 다음달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여행 일정 등 선약으로 인해 지속하지 못했다.
학생과의 관계는 문제가 없었지만 관공서 담당자의 태도는 나의 자원봉사가 무료이기 때문에 가치없어 보이고 폄훼당하는 첫번째 경험으로 앞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자원봉사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한다.
대만 베트남 은퇴 후 살 곳 찾아 여행 빙자 식도락 여행
은퇴 후 살고 싶은 일순위 도시인 달랏에 가서 내내 집보러 다녔다. 달랏 방문을 위해 호치민이나 하노이를 거쳐가며 맛집 투어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보컬 트레이닝
집 근처에서 할 수 있는게 뭐 있을까 당근앱의 커뮤니티 부분을 보다가 어릴 적 합창단에서 노래 부를때의 희열이 더올라 지원해보았다.
가창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초보자 과정이어서인지 기존의 노래에서 개사만 해서 내가 불러보는 과정이었다. 같은 클래스에 있는 다른 사람의 개사 과정에 대해서도 듣고 직접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무엇보다 라이브 밴드의 반주로 즉석에서 변화를 주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이 큰 희열을 주었다.
마지막 발표회도 가졌는데 은퇴 후 활동이 줄어서인지 발표회 사진을 보자 살이 오른 동그란 내 얼굴이 가장 놀라웠다. 이후 2차 과정을 선생님이 추천해주셨지만, 마침 그때 코로나에 걸려 노래를 부르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고 선생님들이 엄청난 음주 실력이 무서워 나는 빠져나왔다. 하지만 너무나 강추!!
모바일쇼핑라이브커머스 전문가 과정
여가부 지원과정으로 구 여성인력센터에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모바일 쇼호스트 양성 과정이라 겉보기에 밝고 매력있는 성정의 분들도 많았지만 자기소개를 하는데 어찌나 다들 우울증이라고 호소 하는지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절친들이 다 우울을 호소해서 자연스레 멀어진 적이 있다.
스마트스토어를 직접 개설하고 각종 라이브 쇼핑 플랫폼에서 직접 쇼호스트가 되어 물건을 판매하는 일련 과정에 대해 교육했다. 강사분들이 훌륭하시고 경영지도사까지 강사진에 포함되어 발성부터 사업에 필요한 실무적인 조언을 해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성인력센터의 다양한 교육은 흥미로우나 직업훈련 후 취업하게 되는 일자리가 안정적이기보다는 프리랜서 쪽이고 취업 후에도 가성비가 떨어지는 현실을 알게되자 수업 후반부로 갈수록 수강생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낙오하는 분위기였다.
연예인 덕질
은퇴 후엔 눈만 뜨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팬 카페 방문하고 인스타부터 확인한다.
이제 백수라 지방 콘서트까지 섭렵 가능. 이 즈음 시작한 개그맨 덕질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고 요새 내 인생 최대의 낙이다. 외국에 주로 있다 보니 직접 참석을 못하고 팬들의 인스타를 통해 내 연예인 활동을 확인해야 해서 아쉬울 뿐이다.
은퇴자 집합소 도서관
일상 중 무슨 책을 볼까 고르는 순간이 가장 설레이는 일상이다.
큰 도서관도 멀지 않지만 앱을 이용해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 책을 배송해 픽업할 수도 있다. 일부 작은 도서관 사서는 고객의 방문을 싫어하는 티를 너무 내기도 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편히 보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도서관은 그녀의 직장이지 그녀의 개인 거실이 아니다. 만 나는 직장을 그만 둔 후 절대 화를 내지 않기로 결심한 바가 있어 코멘트 하지 않았다.
잼버리 문화체험 통역 자봉
이제 돈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좀 의미 있는 일을 해볼까 하던 차에 잼버리 통역 자봉을 찾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전라도 지역 사찰에 배치가 되었고, 내돈내산으로 템플스테이를 즐기는 나는 기꺼이 지원했다.
그리고 역시 공무원들은 일을 개판으로 하는구나 다시 한번 직접 확인하는 기회였고 무척 안타까웠다. 자봉인 나는 정말 설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와츠앱으로 계속 해외 담당자와 연락해서 어레인지 하고 있는 나...
실버인지케어 전문가 과정
학창시절 포함 내가 소속된 집단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무엇보다 자기소개에서 우울증 호소인이 없어서 다행이었고, 모두 열정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
수강생들이 유난히 끼도 많고 유쾌하며 배울점 많은 분들이라 너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연세 많으신 한분이 유난히 강사 말 잘라먹으며 수업과 무관한 본인의 암 치유스토리와 남편 이야기를 해서 참기 힘들었던 점 한가지만 빼면 매우 대만족했다.
강사진 역시 거의 60대 이상으로 경험이 엄청나게 많으신 분들이었고 배울 점도 정말 많았다. 살면서 본받을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최종 발표 전 모의수업 발표시간은 정말 살면서 가장 많이 웃은 날일 정도였다. 얼굴 근육이 당길 정도로 웃어본 적은 있는데 배근육이 당겨서 아플 정도로 주체를 못하고 웃었고 다른 수강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노인집합시설에 강사가 파견되어 교육하는 시간이 많이 배정된다. 이 수강생들이 앞으로 견습을 더 한 후 배치되는데 수업을 마친 후 1년 쯤 후 다시 모였을 때 의외로 많은 분이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워낙 박한 보수 때문에 전업으로 이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나는 60대 이후 이 일을 본격적으로 해볼 의향이 있다.
발표회에서 사진포즈 박수를 만들어 발표했는데 회장님이 노인들이 표정이 굳어 있으니 밝은 표정을 만드는 내용을 구성하라고 조언해주셨다.
코이카 자문단
회사 선배가 재직시 알려준 봉사활동인데 어쩌다보니 내가 먼저 지원해 가게 되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단 한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남미. 어쩔 수 없이 나의 전공분야에 오프닝이 볼리비아 밖에 없어 지원했고 별 기대없이 지원했는데 합격해서 강원도로 국내연수를 갔다.
연수 직후 해외로 나가야 해서 부랴부랴 가지고 갈 짐과 버릴 것을 정리하고 온갖 예방접종을 맞았다.
해외 생활이 길어야 2개월 6개월 이랬는데 최소 1년을 나갈 예정이고, 별 문제 없다면 3년을 머물 계획을 짰다.
가족들이 반대할 것 같아 미리 상의하지 않고 출국 직전 통보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