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 그때 하지 못한 말
'엄마, 엄마가 만날 우리 버렸잖아.'
'진짜?'
'응, 손도 안 잡아주구~'
모녀는 마주잡은 두 손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바짝 붙어 내 앞을 지나갔다.
눈물이 났다.
내가 그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였다면, 나는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4층 혈액암 병동에서 나는 부산스럽게 손을 내저어가면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모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아빠, 잠깐 수치가 올라간 거 잖아. 에이, 내가 맛있는 거 몸에 좋은거 다 해줄게. 걱정하지마.'
강해야했다. 괜찮아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이 더 아플테니까, 나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힘들어봤자, 그 고통까진 알 수 없으니까. 나의 힘듦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그러니까, 웃어야했다.
'다발성골수종3기', '최대 생존 가능 기간 6개월'
그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프리카 세네갈에 있었다.
몇날 며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심신은 극단에 치달아서 생에 최저의 몸무게를 찍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정상적으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래, 그냥 딱 미친년이었다.
관리요원 분의 도움으로 일주일만에 한국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사하라 사막을 한참 날아 가는 동안, 나는 너무 무서웠다.
이 곳에서 바로 비행기가 추락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가고, 또 가도, 누런 사막이 계속 됐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울다가, 자다가, 깨었다를 반복했다.
1년만에 도착한 한국은 낯설었다.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강해져야지, 절대 울지 말아야지. 언제든지 웃을 수 있는 강한 자가 되어야지. 아빠가 더 힘들테니까.'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마음 여린 나의
가장 강한 사람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4년이 흘렀다.
아버지는 마약성분이 들어가있는 진통제를 팔에 붙이고 계셨다.
온몸에 뼈가 있는 곳곳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나마 주물러 줄 땐 조금 괜찮다고 하셨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빠는 고통에 강한 분이셨다. 머리가 다 찢어져 간호사가 죽을 사람이라고 대충 바느질 해놨는데, 살아나서 그 간호사를 만나 농담을 던지셨던 일화가 있고, 아빠가 손에 심하게 화상을 입었을 때도, 손을 통째로 소독약에 담궈버리시는 바람에 흉터가 단 1mm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감히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단지 나는 아빠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 손을 잡고 누워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빠 얼굴 마지막으로 봐야지. 이제 추워질 테니까 외투 하나 챙겨서 내려와, 지금.'
2017년 8월 24일
유난히 더웠고, 유난히 아침부터 기분이 나빴다.
'아빠,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갈게!!'
아빠는 '응'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대답하셨다.
지금도 엄마는 그때 이야기를 하시며, 어떻게 그렇게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좋은 이야기만 했다.
아빠가 가르쳐주신 대로 살겠다고, 아빠 딸이어서 나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고. 사랑한다고
하늘나라가서 아빠 같은 사람, 좋은 남자 찍어달라고. 알지? 아빠가 내 이상형인 거.
못한 이야기가 있다.
아빠 없이는 못 살겠다고, 아빠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나 너무 힘들었다고. 가지말라고.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너무 밉다고, 아무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제발 나 버리지말라고.
오늘 아침 연락이 뜸하던 친구에게서 2년 만에 전화가 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강력히 대장암이 의심되니, 내시경 날짜를 잡으라고 해서 다음주 수요일에 병원에 간다고.
'그냥 잘해.'
'아픈 사람도 그렇지만, 챙기는 사람도 힘들더라.'
'챙기는 사람도 힘들지만, 아픈 사람은 더 힘들어.'
아픈 사람은 마음도 아프다. 가족들을 힘들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크다.
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빠는, 4년의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자식된 이기심으로 나는 아빠가 더 살아주시기를 바랐다.
아빠의 고통은 내가 상상할 수가 없으니, 그래도 제발 버텨줬으면 했다.
대신 아파드릴 수 없어서, 대신 죽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런 내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지난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 해, 마지막날부터
그동안 느끼지 않고 무시했던 그 모든 감정의 독소가 온몸에 통증을 유발했다.
그런 중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과 열등감을 거부해가면서
뭐라도 하려고 아둥바둥 거렸다.
흘리지 않았던 눈물은 범람해서, 시도 때도 없이 눈을 감으면 눈물이 났다.
이젠 안다.
그때 내가 솔직히 말했더라면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어있던, 도려내어진 심장을 내보였더라면,
지금도 그날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진 않았을텐데.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아빠 눈에 자식의 슬픔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냥 잘 해 드려.'
그 말 밖엔 할 수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겨우 잠재웠던 감정들이 다시 깨어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서울대학병원 4층 암병동'에서 손을 내저어가면서 웃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나는 아직도 4층 암병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나는 아빠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에,
응당 느껴야했을 슬픔과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너는 아빠 부둥켜 안고 울어.
그리고 잘 해드려. 미우면 밉다고도 말하고,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 해 드려.
괜찮을 필요없어.
네가 괜찮지 않다는 거, 너만 빼고 모두 다 알고 있어.
아빠가 아프니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아빠 없는 세상은 생각 해 본 적도 없다고.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할 거라고. 아빠 자식이니까.
가능하면 펑펑 울어버리라고.
친구에게 말하지 못했다.
전화 하다 말고 펑펑 울어버릴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