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나 저체온증에 걸린것 같아.
엄마,
초등학생 아들과 오를 산을 고를 때는 난이도가 중요하다. 아이가 다시는 가고 싶지 않게 험하지 않고 적당히 성취감도 들 만한 곳으로 찾으려 한다. 그런데 아이가 소백산을 다녀와서는 좀 지루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평이한 코스이긴 했으나 1,400m가 넘는 산이었다. 하산 길에 등산객이 "누가 여길 꽃 길이라고 그랬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쉬운 코스를 고르지 않아도 되겠구나. 소백산 탐방안내소에서 받은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에 21개의 국립공원이 소개되어 있어 참고했다. 아이와 함께 안 가 본 곳 중 치악산이 가장 가까웠다. 그 전이라면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험하다 여겨져 고려조차 안 했을 텐데 이번엔 갈 만해 보인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치악산의 코스들을 살폈다. 여러 코스 중에 가장 시간이 짧은 황골~비로봉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산의 높이는 같으니 시간이 짧다는 건 가파르다는 뜻일 게다. 괜찮을까 싶지만 올라가다 어디서건 뒤돌면 왔던 길로 돌아갈 수 있으니 가보고 생각하자 싶다.
"그럼 이번에는 이 코스 어때?"
"그래, 엄마. 여기가 우리 스타일에 더 맞을 것 같아"
힘들다며 "나를 여기 왜 데리고 왔냐", "땅이 왜 이리 질퍽거리냐", "이런 길이 제일 싫다" 등등 방언을 터트려가며 산을 오르던 녀석이 어느새 등산 스타일이 생겨있다. 코스를 선택했으니 본격적인 등산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 #1 "힘듦"에 대비하자
코스의 난이도를 가늠했다. 정상까지 거리가 짧다는 건 가파르다는 뜻일 수도 있어 확인했다. 시작 고도와 코스 난이도를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치악산의 비로봉 높이가 1,288m이고 출발지 고도는 400m 남짓이었다.
블로그 산행 후기를 찾아보니 입석사부터 황골 삼거리까지 1.2km 중 처음 600m가 깔딱 고개라고 했다. 이곳을 통과하고 넋이 나가 있는 친구 사진을 올려놓았다. 저 사진 속의 사람이 내가 될까, 아이가 될까 궁금해지다 고개를 흔든다. 잘 대비해서 페이스 조절을 해봐야지. 정보를 찾아볼수록 잘 선택한 걸까 싶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흐름이 있으니 직접 가서 겪어보기로 했다.
준비 #2. 산 정상의 추위에 대비하자.
11월에 들어서면서 하루에도 일교차가 10도 이상 널뛰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침에는 춥고 점심에는 더웠다. 산은 100m마다 0.65도씩 떨어지니 지상에서의 온도에 고도에 따른 온도까지 가늠해봐야 한다. 걸을수록 더워지고 고도에 따라 추워지니 땀 배출이 쉬운 소재를 선택하고 여려 겹을 겹쳐 입어 보온효과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어려운 코스를 선택해 놓으니 이것저것 자꾸 둘러보고 준비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옷들을 찾아보니 반들거리는 느낌이 싫고 합섬섬유라며 잘 안 입어졌던 내의가 흡습속건성 소재인 폴리에스테르라고 나와있었다. 정리 때마다 버릴까 말까 했었는데 놔두길 잘했다 싶다. 아이는 축구교실 때 입는 내의가 비슷한 용도의 소재일 것 같아 찾아 입혔다. 아이는 내의 위에 입을 보온재 역할을 티셔츠가 필요했고 나는 바람막이 잠바가 필요해서 이건 구입하기로 결정. 오르다 쉴 때 입을 경량 패딩도 작게 주머니에 넣어 챙겨갔다. 몸에 닿는 옷은 면이 최고라 여겼는데 땀에 젖어 잘 마르지 않는 면 소재 속옷이 등산 중에는 체온을 급속히 떨어뜨린다고 한다.
준비 #3. 정상 세레모니
산을 오르다 보면 가방에서 커다란 보온병을 꺼내 컵라면을 해 먹는 사람들이 있다. 내 등산의 가장 큰 짐은 아이 인지라 다른 짐은 무조건 줄여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드디어 생존형 등산에서 벗어났는지 산에서 컵라면이 먹고 싶어 졌다. 우리 배낭에도 보온병과 컵라면이 추가되었다. 얼마나 무거울까 싶어 엄두도 못 내던 건데, 막상 해보니 설렘이 무게를 날려버린다.
오, 치'악'산. 두근두근 떨린다. 산 아래 숙소에서 하루 묵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 있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산행은 급한 마음에 일찍 서두르면 아이가 오르기도 전에 포기하기도 한다. 산행이 낯선데 춥고 바람은 부는데 저기로 오르자면 아이는 한 발이 안 떨어진다. 그럼 그 길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다. 아이는 푹 재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출발시간이 너무 늦으면 해 지는 시간에 걸려 하산 때 깜깜할 수 있게 된다. 오후 3시쯤 비 소식이 있길래 서둘렀는데 재촉하지 않으며 밥 든든히 먹이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편도 시간이 2시간 30분이라고 나와 있으니 왠지 훌쩍 다녀올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왕복시간을 따져보면 왕복 5시간이고 아이가 포함되면 1-2시간은 쉽게 늘어난다. 너무 여유 부렸구나 싶다. 다행히 하늘은 뿌옇기만 하고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탐방 지원센터에 들려 국립공원 여권에 도장부터 찍는다. 초등학생에게는 인증, 기념 이런 것들이 동기부여에 매우 중요하다. 도장을 찍고 있으니 직원이 나와 도장 10개를 찍으면 은메달을, 21개의 도장을 찍으면 금메달을 준다고 신청방법을 알려준다. 아이와 산행 앞날에 순풍이 불어온다. 초등학생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등산이 좋은 점 보다 도장,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은메달이 더 좋다. 다음에 또 가고 싶어 지는 이유들은 산이 그곳에 있어서가 아니고 간식을 싣컫 먹을 수 있고 다녀와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때 너무 좋아서 이다.
#1 아스팔트 오르막길의 연속, 입석사는 언제 나오나.
탐방지원센터 ~ 입석사 1.6km
난이도 보통
등산 앱을 켠다. GPS 기능이 있는 등산 앱은 안전산행을 도와준다. 정상과 시작 지점 사이에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니 초보자의 불안을 달래준다. 설정에 따라 1Km 통과할 때마다 음성으로 알려주고 특정 지역을 통과하면 음성안내와 함께 인증마크를 앱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이번 길에서는 쥐너미전망대와 비로봉 인증마크를 받았다. 획득 고도와 평균 이동속도를 확인할 수 있어 좋다.
등산로 초입이 아스팔트 오르막 연속이다. 우려와 달리 아이는 "이 정도는 쉽지~"하며 씩씩하게 갔다. 이러다 어느 정도 올라 편안한 길에서는 아이의 입말이 폭발한다. 나는 이 시간이 좋아 아이와 산에 오른다. 평소에 말이 없는 편인 아이가 학교 이야기, 어디서 들은 말, 머릿속에 떠다니는 말장난들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치약산인가? 치약인가?" 초등 유머를 함께 즐기다 너른 터에서 잠시 물 한 모금 축이고 간다. 하산하는 등산객이 아이에게 작은 초코바를 봉지 째 내어주신다. 감사하지만 챙겨 온 간식들도 충분했고 이제 등산 초입이라 무게를 더 늘릴 수는 없다. "우리도 무거워 주는 거였는데" 라며 웃으며 다시 받으신다. 아이와 산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예상치 못한 격려와 선물이 올 때가 있다. 잔뜩 무장하고 오르는 우리와 달리 얇은 티에 패딩조끼 하나 입은 아이를 데려온 일상복 차림의 가족이 오르고 있다. 동네 뒷산 삼아 자주 왔었나 보다.
드디어 입석사에 도착했다. 약수터가 있길래 올라오며 먹은 만큼 물병을 채우며 잠시 쉬어간다. 돌 거북이가 퉤퉤 뱉어주듯 물을 내려주고 있다. 이쯤 오르면 오늘 함께 오를 등산객들의 얼굴들이 익는다. 정상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만나게 될 이웃들은 우리 아이보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오르는 부자지간이 있고, 할아버지들 한 무리, 중년의 부부 한 팀, 그리고 초반부터 함께 온 숨을 헉헉대며 가고 있는 면 티 하나 입은 젊은이, 입산사에서 만난 동네 주민인 듯한 가족도 오늘의 등반 동기다.
#2 대망의 입석사 뒤 600m 오르막 구간!
입석사~ 황골 삼거리 1.2km
난이도 어려움
가파른 길은 힘들지만 대신 높은 고도를 얻게 된다. 어떤 길들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여기서부터 600m가 가장 힘들다고 했으니 아이와 각오를 다져가며 올라본다. 가파른 계단이 입구부터 기다리고 있다. 아이는 계단을 오르면서 이래서 치"악!"산 이구나를 외친다. 지나가던 등산객이 피식 웃는다.
물 뱉어주는 거북이 가파른 계단 이후 오르막길 연속. 무너진 돌길을 새 돌로 고치는 중이었다.
무너진 돌계단을 수리할 하얀 돌들이 등산로 옆으로 중간중간 쌓여있다. 아직 다 고쳐지지 않은 오래된 길과 곁에 쌓여있는 돌무더기까지 있으니 걷기가 편치 않다. 이 돌들을 큰 주머니에 담아 헬리콥터로 날랐을 광경들을 상상해가며 보니 바로 위 나무에 부러진 가지들이 보인다. 오르막 길 끝에 닿아있는 하늘이 보인다. 저기가 끝일 것이라고 아이를 격려하며 도착해보니 평상이 있다. 드디어 우리도 가장 힘든 코스를 지났다. 힘든 코스의 보상인지 다음 구간에 양탄자처럼 편한 길이 펼쳐져 있는 게 보인다. 그런데 아이의 컨디션이 심상치 않다.
"엄마 나 저체온증에 걸릴 것 같아"
오르막길을 오르며 했던 아이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다. 저체온증이 온 것 같다는 아이 말에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싶기만 했었다. 처음으로 등산복 옷 소재를 따져가며 가이드대로 잘 겹쳐 있고 왔고 날씨가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가장 어렵다는 구간을 통과하고 난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확인해 보니 아이의 윗도리가 바지에 껴 있지 않다. 이 차림으로 올라왔다면 배로 찬 바람이 내내 오갔을 것이다. 기본 중에 기본을 놓쳤다. 아이가 이 정도는 알거라 넘겨짚은 게 문제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것도 알려줘야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 검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도복은 몇 달이 지나서야 입을 수 있었다. 사범님이 리본을 스스로 묶을 수 있어야 도복을 입는다며 리본 매는 연습시키라 했다. 그제야 리본 매는 법도 배워야 아는 거구나 싶었다. 아이가 그동안 신발끈을 어떻게 묶고 다녔나 봤더니 찍찍이가 달린 벨크로 형태의 신발을 신고 있다. 본래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들 하나하나에 대한 잊었던 기억들이 아이를 키우며 되살아난다. 추울 때 티셔츠를 바지 속에 넣어 입으라는 것도 알려주어야 하는 거였구나! 이렇게 또 배웠다.
아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얼굴을 보니 불긋 불긋 한 것들이 올라와 있다. 허벅지도 간지럽다고 하고, 엉덩이도 간지럽다고 하기 시작한다. 온도에 반응하는 알레르기의 일종이다. 둘째가 심해서 신경 써 관리하고 있는 부분인데 첫째에게는 오늘 처음으로 나타났다. 피부가 춥다고 말하고 있다.
"꼭 정상까지 가야 치악산을 다녀온 건 아니야.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린 치악산에 다녀온 거야" 아이를 달래 가며 하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아이 몸에 온도도 올릴 겸 정상에서 먹기로 한 컵라면이나 먹고 내려가기로 한다. 마침 평상도 있다.
하산하는 아저씨 일행이 얼음물 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 컵라면에 붓고 커피 한잔 타고 남은 물을 건네 드렸다.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을 드리고 짐을 줄이니 서로 좋다. 아이 쉬는 동안 경량 패딩을 꺼내 입어 체온을 유지하고 목수건, 겨울 모자도 꺼내 씌운다. 준비물을 이렇게 잘 챙겼는데 저체온증이라니! 라면 먹는 동안 하산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정상엔 바람이 많이 분다고 다녀온 소식을 알려준다. 우리 사정 얘기를 들으시더니 핫팩 두 개를 주신다. 따뜻한 물 한잔, 아이가 권했던 라면 한 수저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시면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자 아이의 컨디션이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3 더 갈래.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
황골 삼거리~ 비로봉 삼거리
난이도: 보통
"더 갈래.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
라면 먹고 나더니 아이가 뛰기 시작한다. 나도 덩달아 뛴다. "저러니 엄마가 데리고 다닐만하겠네!" 핫팩 아저씨의 소리가 들린다. 쉬운 길일 때 어서 가자. 능선 타는 평지길도 있고 허벅지 하나 내어놓는 기분으로 올라야 하는 계단도 지난다.
코스 #4 설마 저기가 정상은 아니겠지
비로봉 삼거리 ~ 비로봉
난이도: 어려움
옆 산 꼭대기에 돌무더기 탑이 보인다. 탐방안내소에서 찍은 치악산 도장에서 본 돌탑과 비슷하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저긴 너무 멀잖아. 예정에 없던 라면을 먹으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마음이 급하다. 저 돌탑은 너무 멀리 있어 보여 옆산의 꼭대기로 보인다. 그런데 그 돌탑이 비로봉 위에 돌탑이었다. 길은 멀리서 보이던 돌탑까지 연결되어 정상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비로봉 직전 마지막 오르막 앞에 섰다. 치악산의 어떤 코스를 택해 올라와도 비로봉에 가려면 마지막 구간은 진한 갈색의 "어려운" 구간을 지나야 한다. 봉우리 직전 구간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데 마지막 계단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게 보인다. 이 맛에 온다. 아이는 벌써 뛰어 올라가 마지막 계단에 앉아 나를 내려보며 기다리고 있다. 휴~ 우여곡절 끝에 비로봉에 도착했다. 올라오며 온 힘을 쏟아 쑥 빠져 보이던 아이의 얼굴이 정상의 풍경 속에서 그윽하게 차오른다. 산은 오르긴 힘들지만 올라가면 좋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때가 너무 좋다고 했다. 아이의 말처럼, 이제 즐거운 일만 남았다.
# 하산길
내리막길은 순식간이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이 때문에 더 초고속으로 내려왔다. 오를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내리막은 휙휙 지나간다. 입산사 화장실을 못 찾아 꾹 참고 입구 화장실까지 무사히 도착해 화장실에 입장했다. 험한 코스를 겁낸 덕에 많이 준비할 수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들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아무리 준비해도 무슨 일이든 벌어진다, 그러니 적당히 준비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단 경험하러 또 떠나자!
하산 후에 남은 또 다른 즐거움, 산 밑에서 맛집 찾아 먹는 일이 남았다. 뜨끈한 동태탕 한 그릇과 불고기 백반을 먹고 왔다. 피로가 좀 가시고, 등산은 채 여운이 가시기 전에 나도 아들처럼 이웃들에게 등반 보고(겸 자랑대회)를 하고 싶다. 가을이 치악산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