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쉽다 해서 올랐지

- 아들아, 완만하다니 해발 1,400m 함 올라보자.

by 안녕나무


아들과 소백산에 다녀왔다. 목표는 비로봉이었다. 비로봉은 해발 1,439.5m로 높지만 완만하게 정상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를 품고 있다. 소백산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위치해 있다. 들머리를 충북 단양에서 시작하는 천동탐방코스로 잡았다. 서울에서 가자면 영주보다 단양이 한 시간 더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원점회귀코스로 편도 6.8km, 3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아이랑 같이 가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한 시간 더해 왕복 7시간의 등산 준비를 했다.


숙소에서 나와 주차장을 지났다. 주차장을 지나니 천동캠핑장이 보였다. A12번 데크 위치를 확인했다. 하산해서 남편과 둘째를 만날 곳이다. 남편 퇴근 후에 만나 출발해 밤 늦게 도착했다. 등산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숙소를 예약해뒀다. 짐을 풀기도 전에 숙소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주인이 별이 많은 곳을 알려준다. 말투에 옅은 흥분이 묻어있다. 주인 아저씨 말만 듣고 방으로 향했던 발길을 돌렸다. 온 가족이 컴컴한 숲길로 향했다. 생전 본 적 없는 다리를 찾아 어둠 속을 더듬어갔다. 아이들은 무섭다며 돌아가자고 보챘다. 가로등도 더 이상 없는 길을 가다보니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에서 올려다보니 정말로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빛 공해가 없어 별보기 좋은 자리였다. 발 밑의 계곡도 까맸다. 새벽에 랜턴 빛을 따라 노고단에 오른적이 있다. 랜턴이 비춰주는 동그란 땅과 앞사람 뒤꿈치만 보며 올랐다. 첫 종주였다. 대피소에 도착했는데 탄성이 나왔다. “우와, 별이 눈앞에 있어!” 그 별을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자며 기다렸다. 새벽에 나갔더니 안개가 자욱했다. 눈 앞에 사람이 걸어가면 안개 속으로 사라져졌다. 별은 잊고 안개놀이만 실컫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별을 보게 되다니. 하늘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왔다.


빛이 환할 때보니 다리 앞에 기념비가 있다. 산악인 허영호씨의 세계 최초 3극점 7대륙 정상도전 성공을 기념한비다. 그가 이 등산로를 자주 다녔다고 한다. 발 밑에 까맸던 곳은 다리안 폭포였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에 계곡을 두고 오르기 시작했다. 계곡에 물이 적다. 바위 마다 온통 이끼다. 두텁게 쌓여있다. 절벽도 이끼 색이다.


탐방 안내소에 도착했다. 등산로 주차장 한편에 주로 있는데 소백산은 높이도 있다. 안내소 현관 오른쪽에 작은테이블이 나와있다. 초등학교 책상만 하다. 국립공원 스탬프투어 여권에 찍을 도장이 준비돼있다. 아이 여권에 첫 번째 도장을 찍었다. 소백산에 방사했다는 여우가 새겨진 도장이다. 내 여권 소백산페이지에는 이미 도장이 찍혀있어 두 번째 방문 날짜만 찍었다. 거리두기로 시댁을 처음 안 간 추석 명절에 혼자 답사를 왔었다. 구하기 힘든 국립공원 여권을 탐방안내소에서 나눠줬다. 명절 같았다. 답사 때는 새로 산 등산화가 복숭아뼈에 닿아 정상의 반쯤 오른 곳에서 하산해야 했다. 산이 험하지 않아 일반 운동화를 신어도 되는 길인 것을 확인했다.




출발하며 켜 둔 램블러 등산앱이 1km 지났다고 알려준다. 간식을 먹기 위해 가방을 내렸다. 물병이 안보였다. 더 시원하게 하자고 숙소 냉동실에 넣은 게 떠올랐다. 답사까지 했건만 물을 놓고 오다니. 다행히 간식 중에 사과와 배가 있다. 둘이 먹기엔 양이 많아 덜어낼까 싶었는데 다 가져와 천만다행이었다. 아이와 함께라 계획대로 되지 않는게 아니구나. 여행이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았었지. 물 대신 과일로 수분을 섭취하며 가보기로 아이와 의기투합해본다. 다행히 물 외에 열량을 낼 만한 간식은 충분했다.


완만한 산 길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탐방길이었다. 흙 길에는 두꺼운 야자수 카펫이 깔려 있고 흙길이 넓어지면 두 줄의 시멘트 길이 놓아졌다. 걷기 편했다. 산길에 익숙해지니 아이가 말을 시작한다. 저만큼이 다 어디에 다 들어있었을까. 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차곡 차곡 적어 놓았었다. 돌 지난 아이가 했던 첫 문장은 “문이 내려간다” 였다. 아저씨가 셧터를 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들었던 모든 말들을 품고 있다 뱉는 것 같았다. 다섯 살엔 “그 무엇보다 자기를 우선해서 사랑해야 해.” 라고 말했다. “잠자리”가 알려준 말이라고 했다. 아이가 한참 빠져있던 애니메이션 터닝매카드에서 변신로봇 잠자리 메가 레드가 한 말이었다. 대사가 터질 때 마다 터닝매카드를 보지 않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감탄이 이어졌다. 열 한살이 된 아이의 말은 어디서 온 말인지 알 수 없는 게 많다. 더 이상 받아 적지도 않는다. 언제부터 아이 말을 들으며 좋은 말과 해서는 안될 말로 구분해주기 바빠진걸까. 변한건 아이가 아니라 나일까. 맥락 없이 쏟아져 내리는 말들 위로 내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의 삶이 그려진다. 선율이가 했던 웃긴 말이 떠올랐다며 볼 풍선을 터트린다. 침이 튄다. 배를 잡고 깔깔 웃는데 정말 “깔깔” 소리가 났다. 내가 못하게 하는 크래쉬 로얄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자랑한다. 상대 성을 먼저부수고 내 성을 오래 지키면 이기는 게임이다. 아빠 퇴근만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낚아채 방문 닫고 익힌 실력이다. “엄마,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가 시작되면 귀가 쫑긋해진다. 아이의 기억과 내 기억이 어떻게 차이 날지 궁금해 숨을 멈추고 기다리게 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목군락을 지나자 넓은 시야가 펼쳐졌다. 가파른 계단 한번 없이 정상이다. 데크 길 양 옆으로 산등성이가 초원처럼 펼쳐져 있다. 산들의 중첩이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정상까지 이어진 나무데크 길은 소백산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아이의 표정이 낯설다. 엄마 품에 파고들어 젖 먹으며 안정을 찾던 품 안의 아기는 어디로 갔을까? 짠 하고 사탕 하나 꺼내주면 이마부터 턱밑까지 웃음을 가득 머금던 어린이도 이제 없다. 나보다 발이 커진 아이가 서 있다. 십대의 문턱에 선 아이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지만, 내 눈에는 아직 어리기만 하다. 과일도 이제 떨어졌다. 정상에 오른 뿌듯함을 기대했던 곳이 타는 목마름으로 가득할 줄이야. 비로봉 정상석 사진줄에서 섰다. 등산객들 배낭에 매달린 물통만 보였다. 앞 줄 사진을 찍어드리고 아이 물 동냥을 했다. 이제 내려가니 더 먹으라 재차 권해서 아이만 두 모금을 얻어 마셨다. 감사합니다 소리가 연거푸 나왔다.



“산은 오르기는 힘든데 친구들에게 자랑할 때는 좋아” 태백산맥을 내려다보던 아이가 말한다. “그러게. 지금부턴 즐거울 일만 남았다” 메아리 해본다. 너른 데크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컵라면을 보더니 다음엔 우리도 준비해오자고 한다. 앞으로 짐도 늘고 재미도 늘겠다. 하산 길은 순식간이다. 캠핑장이 보인다. 맛있는 저녁이 지어져 있을까. 둘째 따라다니다 지쳐있을까. 배가 고프다. 소백산을 가득 채우고 속세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