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나무 Jan 26. 2021

하나, 두울, 시엣

아이와 기다리는 시간을 채우는  방법

"하나, 두울, 시엣, 네에, 다서엇, 여서엇..... "

아이가 내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더니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까만 아이 머리통을 내려다보다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쳐본다.  

동그란 입술이 새처럼 작게 움직이고 있다. 

"일고옵, 여더얼, 아호옵, 여얼..." 

숫자가 열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이 입술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그다음도 알아?'라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준다. 

"열하나, 열두울, 열세~엣, 열 일고옵, 열아호옵, 스물"

열셋을 지나면 하나씩 건너 뛰며 세어 스물에 도착했었는데 오늘은 새로운 숫자 길로 스물에 도착한다. 

"와 고마워. 니가 숫자를 세주니 엄마가 편안해졌다" 

아이를 꼭 껴안아 준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아이와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생기면 숫자 세곤 했었다. 

아이 눈을 바라보며 두 손을 잡고 입술에 힘을 주면서 마치 중요한 주문을 외우듯이 숫자 세기를 시작하면 아이는 무엇을 기다리는 중이었는지 잊고 내 진지해진 표정과 입술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느 날부터는  숫자 세는 속도에 맞춰 이아도 입이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수 세기는 기다리는 시간에 하는 놀이가 되어 '십'에 도착하면 우린 함께 기뻐했다. 


아빠가 퇴근해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수영장 대기실에서 수업이 끝난 오빠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끝이 어딜지 알 수 없는 시간에 닿아 막막해지면 하나부터 열까지를 세며 채워가다 열에 도착해도 기다리던 일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황들이 늘어나자 "십일"로 넘어갔다. 우리는 요새 "이십"까지도 간다. 


"이제 목욕하러 출바알~"


아이 목욕물을 받는 중이었으니, 아이가 나에게 와서 숫자를 세어 줄 필요는 없었다. 물이 조금 더 채워지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는 거실에서 장난감들과, 나는 부엌에서 그릇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놀다가 숫자 세기가 떠올랐으리라. 같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에게 다가와 내가 아이 손을 꼭 잡고 숫자를 세었듯이 내 다리를 꼭 안고 숫자를 세기 시작한 것이리라. 다섯 해 동안 채워진 입 말과 행동들이 아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시간을 목격한다.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부족해서 아니라 좋았어서 그립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