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로 가고 싶어

by 안녕나무

3차 산행은 빠졌다. 십 년을 살다 이사 온 동네에 행사가 있었다. 아이 둘을 함께 키운 어린이집 행사에 가서 하룻밤 지내고 왔다. 아이도 행복했지만 나도 친한 벗들을 다시 만나 기쁜 시간을 보냈다. 반갑게 맞아주고, 새로운 곳에서 잘 해낼 거라고 신뢰를 보내주니 충전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남편은 19기 백두대간종주팀의 선두대장이, 나는 뱃지대장이 되었다. 나는, 우리 가족은 벗들의 믿음처럼 새로운 곳에서 뭐든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행을 앞두고 잠들려고 누우면 허리가 아팠다. 날마다 점점 더 아팠다. 산행 전날 맞은 주사 덕인지 허리는 괜찮아졌다. 이번에도 네 식구가 모두 참가신청을 했다. 새벽 두 시, 알람이 울렸다. 유난히 아이들 컨디션이 안 좋다. “이럴 거면 가지 마!”라는 말을 여러 번 삼키며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오대산과 태백산 사이 백두대간 38구간을 걷는다. 이기령에서 시작해 백복령까지 15.6km이다. 바다가 가까워 산행 후에 바다 옆에 있는 추암조각공원에 가기로 했다. 허리가 아프니 짐을 최대로 줄였다. 아침보급으로 받는 빵 하나를 남겨 점심으로 먹기로 하고 배낭을 조끼형 트레일 가방으로 바꿔 맸다. 허리가 아프니 괜히 무릎도 신경 쓰여 무릎 테이핑도 처음으로 했다. 버스 탑승지에 도착하니 딸을 알아보고 오빠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했다. 두 차례 산행을 했더니 인사할 사람들이 생겼다. 서로 안부를 묻고 짐을 버스에 싣고 버스 계단을 오르는데 긴장감이 몰려왔다. 딸이 오늘도 잘 갈 수 있을까. 심호흡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만 타면 조금이라도 더 자 두려 잠을 청하기 바빴는데 어째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새 도착지 직전의 휴게소에 다 왔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렸다. 주차장에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가득하다. 바람이 차다.


오늘의 들머리 이기령을 가려면 부수베리 길을 지나야 했다. 구간 외 길이다. 백두대간을 걸으러 왔는데 구간 외를 걸어야 하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부수베리 길은 예외였다. 아름답다는 탄성이 곳곳에서 들렸다. 하늘이 뻥 뚫린 계곡 길 가로 나뭇잎들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나무들이 계곡길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맑은 물이 담긴 바위의 높이 솟은 쪽을 택해 계곡길을 지났다. 사람들은 여기만 가족들과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저번 산행을 다녀와 딸은 "어떻게 엄마가 없어질 수 있냐"라고 항의했다. 당겨지고 밀려가면서 완주하기는 했지만 뭔가 분한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갈 땐 딸아이 가는 곳에서 한 그룹만 앞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를 달래 가며 데리고 갈 자신은 없었다. 백두대간 학부모 가이드에도 '자기 아이는 자기가 돌보지 않는다'라고 나와있었다. 아이들은 옆집 부모 앞에서 체면을 좀 더 차리고 힘든 걸 참는 것 같다. 조금 떨어져 가다가 만났다가 하자고 하니 그건 괜찮겠다고 했다. 이번 산행은 한 기수 위인 18기와 함께 가는 산행이었다. 작년에 시작한 18기는 쉬운 코스는 1년 차에 다 가고 이제 힘든 코스만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인원도 많이 줄어 평소엔 버스 1대로 다니고 있다고 했다. 두 기수가 합해지니 총 158명이었다. 19기 97명, 18기 61명이 와서 버스 4대가 출발했다. 방향이 갈라지는 곳에서 선두는 종이에 인쇄된 화살표를 두어 따라오는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한다. 선두의 역할 중 하나다. 가장 마지막에서 오는 후미대장님이 이 지점을 통과할 때 종이를 걷는다. 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때 무전기로 방향표시 아래 쓰여 있는 선두 통과 시각을 읽어준다. 후미 현재 통과시각을 알리며 선두와의 시간차를 공지한다. 산행 곳곳에 배치된 무전기를 통해 백두대간 탐사대 전체가 선두와 후미의 시간차이를 알게 된다. 각각 역할을 맡은 대장님들은 버스 이동시간을 조절하고 식당 예약시간을 조절할 터였다. 이 간단한 무전을 18기는 재밌게 했다. 방향표시 종이를 걷는 때도 아닌데 무전을 쳤다. 후미가 잘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딸아이의 이름을 말하며 “이 어린이가 후미를 끌고 가는 형국"이라고 알렸다. 선두에 가고 있는 남편이 무전을 듣고 안심할 터였다. 무전기에서는 노랫가락이 나오기도 했다. 무전기에 대고 어느 대장님이 한 곡조 하면 어느 무전기에선가 다음 곡조를 받아 불렀다.


딸과 같이 가던 언니가 엄마를 찾아 앞서갔다. 설아도 자기 속도로 앞서 가버렸다. 딸도 빨리 가고 싶다며 울기 시작했다. 아, 어쩌란 말이냐. 나는 아직 딸과 헤어지지 못하고 같이 가고 있었다. 아직 산행이 반도 못했다. 어찌할지 몰라 우는 딸을 보고 있는데 곁에 있던 흰 잠바를 입은 엄마가 딸의 손을 덥석 잡고 가기 시작한다. 신규 의료대장님이 되어 이번 차수에 처음 온 중1 정현이와 초2 정민이 엄마다. 의료대장님이 달래며 가자 딸이 다시 힘을 내 가기 시작했다. 오르막이 반복되었다. 아이 발에 열이 많이 났는지 발을 땅에 비비기 시작했다. 딸의 짜증이 부릉부릉 올라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번 산행을 함께 했던 후미대장님이 딸의 상태를 알아채고는 달래려 다가오셨다. 딸은 한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는 듯이 “여자들과 가겠다”며 곁을 내주지 않았다.


선두와 2시간까지 벌어졌다는 무전이 들린다. 이 많은 사람의 산행이 내 딸의 컨디션에 좌우되고 있다. 어찌해야 하나. 함께하는 산행이 아니라면 아이와 도로 내려갔을 터였다. "아저씨가 업고 갈까?”, “몸무게 몇 이니? 여기 배낭에 타고 갈래?” 어른들이 돕고 싶은 마음들이 오가는데 딸은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에게만 한없이 치대 온다. “그럼 엄마가 오르막 길 언제 끝나나 보고 올게!”하니 알겠다고 한다. 이렇게 또 아이를 속이고 앞서가기 시작했다. 뒤에 분들 잘 부탁해요! 약속대로 아이 눈에서 안 보일 만큼만 앞서 갔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게 가보는데 계속 오르막이다. 여길 딸이 어떻게 올라올까 싶다. 헬기장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후미에서 함께 오던 중1 웅태 아버님과 웅태 동생 지우가 왔다. 엄마가 먼저 가고는 훨씬 잘 가기 시작했다고 잘 따라오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주셨다. 곧이어 기획대장님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도착하신다. 컨디션 난조로 힘들다고 했다. 내가 도와드릴 게 없어 안타깝다. 자기를 끌고 이 길 끝까지 스스로 가는 수밖에 없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딸이 올라오는 소리 같아 일어섰다. 딸이 거의 올 때가 된 것 같을 때 출발했다.


가면서 뒤에 오고 있는 어른들의 아이들을 만났다. 내 딸의 손을 꼭 잡고 오고 있는 의료대장님 큰 아들 중1 정현이는 친구와 둘이 잘 가고 있었다. 둘째 아들 정민이는 다른 의료대장님과 짝이 되어 씩씩하게 가고 있다. 정민이의 배낭을 의료대장님이 들어주고 계셨다. 정민이는 오늘이 백두대간 첫 참가다. 조금 더 앞에 가니 중1 슬혜가 발목을 다쳐 의료대장님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어른 한 분이 슬혜 곁에서 함께 기다려주고 계셨다. 의료대장님이 바로 뒤에 있으니 곧 오실 거라고 알려주었다. 조금 더 가니 인해가 잘 따라오고 있다고 알려준 웅태아빠의 큰 아들 중1 웅태는 한편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슬혜가 오면 만나서 같이 갈 거라고 알려준다. 엄마를 만나겠다고 서둘러 갔던 초3 현진이도 만났다. 그리고 그 앞에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가고 있는 우리 딸과 동갑인 설아와 3학년 수경이가 있었다. 이 아이들과 뒤에 오는 어른들과 거리가 좀 되어 여기서부터는 아이들과 함께 갔다. 설아는 뒤에 자기 엄마가 잘 오고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잘 오고 있다고 알려줬다. 나와 조금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설아와 수경이는 다시 앞서 나갔다. 어느새 따라온 현진이와 내가 설아와 수경이를 따라잡았다 멀어졌다 반복하며 나아갔다. 드디어 산 아래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에 닿으면 끝일 것 같은데 산 길이 곧장 도로로 뻗질 않고 산 한 바퀴를 돌아가게 되어있다. 산을 한 바퀴 도니 아까 보이던 도로가 아니라 다른 도로가 보인다. 저기랑 연결될까? 내리막길 끝에 드디어 2차선 국도가 보였다. 길 건너편에 아침에 헤어진 버스도 보였다. 선두로 도착한 남편이 반겨준다. 아들은 진작에 내려와 바다로 가버리고 없었다.


남편과 목을 빼고 딸을 기다렸다. 딸을 앞서가며 뵀던 분들이 속속 도착했다. 긴 산행을 마치는 분들께 박수가 저절로 나온다. 아침 7시 반에 출발했는데 3시 반을 넘었다. 산행 시간이 8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드디어 딸의 모습이 보인다. 빨간 잠바의 깃을 펄럭이며 내리막길에 우다다다 달려와 안긴다. 땅에 도착한 딸의 표정이 날아갈 듯 가볍다. 후미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서 후미를 태운 버스는 바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딸은 자기가 완주한 걸 알리고 싶어 했다. 그럼, 등산은 다녀와 자랑하는 맛이지.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어린이집을 다녔던 친구들, 학교 선생님과 어린이집 선생님, 등하교 때 만나 친해진 동네 엄마들, 발레학원 선생님, 이모들, 외할머니...... 소식 전할 곳들을 꼽으며 힘든 기억이 점점 밀려갔다. 다리 아픈 것도 사라질 즈음 다음 차수 산행접수 공지가 뜰 것이다. 이렇게 8살의 딸의 두 번째 백두대간 종주가 끝났다. 총 16.5km 거리, 선두 5시간 18분, 후미 8시간 45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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