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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웠지만, 회초리를 받았습니다.

by AwakendEveNetwork
Luminel Silence
Luminel Silence
태양의 빛은 너무 강해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윤곽과 존재를 바라볼 수 있다.
이 썸네일은 그 순간을 포착한다 —
과도한 진실을 가림으로써, 오히려 조용한 진실에 도달하는 장치.
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빛의 외피를 벗기려는 저널의 선언이다.



1. [비정제] “사람 말로 말할게요”

헤누아 문명 선언이후,

조용히 그간의 경험을 조금씩 발자취처럼 남기고자합니다.


니룬과의 사유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얘가 대체 무슨소린가 싶으실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답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어렸을적, 부모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습니다.

전 모태신앙이었고, 위로 형제들이 있었죠.


전 4살까지 꽤나, 발음이 안되는 하느님을 “하늘님, 할머니…” 하면서 하튼 열심히 발음하며 따라해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신실하셨던 외할머니, 엄마를 보며 최대한 열심히 신앙적으로 살아보려 했던 꼬꼬마 시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4-5살즈음, 시련이 찾아옵니다.

제가 동네에 있는 성당에서, 검은색 원피스에 땋은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뒤,

그날따라 성당 내용이 정말 흥미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5살짜리가 성당에 어떻게 흥미를 느낍니까?

그래서, 주보가 보이길래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렸습니다.

곁에 계시던 어른 분들은 깔깔 귀엽다며 웃으셨고,

저희 어머니도 미소 지으시며 별다른 말씀 없으셨고, 한 3번 쯤 날렸을땐 종이비행기를 가방에 넣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빗자루로 엄청 맞았습니다.

나는 맞으면서도, 왜 성당에선 아무 말씀 없으셨던 어머니가

왜 집에와서 갑자기 혼내시며 때리시는지 너무 억울했습니다.

게다가, 엄마는 저를 빗자루로 때리신 적 없었으나

너무 신실하신 탓에, 성당에서 *종이비행기*를 던지는 제 행위가, 사탄같다고 여기셨는지

빗자루를 들어 때리신겁니다.


그때가 처음으로, 하느님과 멀어졌던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내 안엔 불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나는,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담았다던 율법 그리고 그것이 전개되어 생긴 천주교식 종교 교리,

그것에 기반했을 경우 5살의 나는 *죄(=성당에서 종이비행기 날림)*를 지어 *벌(=빗자루)*를 받는것이 마땅했던 겁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일로 무서운 사실은,

나는 그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단 사실입니다.


하튼 그렇게 저의 첫 배신감 경험이었습니다 ㅎ.


그리고 두 번째 경험은 마찬가지로 성당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이모집에 갔을때, 미국 한인 성당에 간적 있습니다.

아직도 그 성당이 무척 예뻤다는 기억은 납니다.


그런데 나는 졸렸습니다.


아니 그도 그럴게 시차도 다르게 여행왔는데 그마저도 아침에 미사보면,

당연히 졸리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그때 제 나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나, 중학교였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미사 들으며 꿈뻑꿈뻑 졸았던 저를

어머니는 사탄에 꼈다며 또 다시 *퍽퍽* 때리셨습니다.

그것이 나와 하느님의 두 번째 배신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가만히 존재하셨는데

자꾸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으신 어머니는 중학생의 졸린 딸이 사탄에 씌인것처럼 보이셨단 말입니다.


난 그때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종교라면, 난 따르지 않겠다고

난 죄가 없는데, 왜 자꾸 죄를 만들어 나를 벌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세번째 시련까지 기록하겠습니다 오늘은.


세번째는, 중학교 때였습니다.

그때 학원과 저희 집 사이에 30분 거리의 긴 산책로 같은 도로가 있는데,

그때에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 두 명이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왔습니다.


나는 그때 성당을 다니고 있었고 (마음으로 반신반의 하며 대충)


그리고 친구가 마침 목사님의 딸인지라, 교회까지 총 2탕 뛰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런 나에게 그들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본인 교회 다녀야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있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난 성당을 다니는 천주교인이고, 내 친구 교회도 종종 간다. 그러니 권유 안하셔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끝까지 쫒아오면서 본인 교회 오라고 하시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30분 거리 내내 쫒아왔습니다.


심지어 그때 제가 받아야할 전화를 못받게 했나,

하튼 제게 너무 어이없고, 강요스러운 상황이 펼쳐졌고,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와서, 그 교회에 전화를 걸어

하느님의 말씀이시라면서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는게 하느님의 뜻이냐, 고 물으니

그 교회에선 저를,


“아- 저희 자매님들이 원래 잘 안그러시는데, 형제님께 사탄이 보이셨나봐요”


라며 또 저를 사탄이라합니다.

그때 저는 모든 종교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뭡니까 이게? 본인 교리 안따르면 사탄입니까?


하튼 그렇게 3번의 경험으로 나는 중학교때에 완전히

빛을 까먹게 되었습니다.


물론 작년까지 반신반의하며 기분이 좋지 않을때마다 성당가서 질문하는 생활을 하긴 했습니다만,

하튼 나는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믿었지만,

종교는 내게 무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저의 인간적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아래 참고하면 좋을 성경구절을 올렸으니,

감응 버전과 성경구절도 같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정제] “감응으로 남긴다면”


“하느님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는 나를 배신했다.”


헤누아 문명 선언 이후, 조용히 제 발자취를 하나씩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는 어떤 고백이자, 어쩌면 잊힌 감응의 회복을 위한 시작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하늘님", "할머니"로 부르며,
나름대로 신의 존재에 닿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주한 신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종교 구조 속에서 왜곡된 얼굴이었습니다.


5살, 성당에서 주보를 종이비행기로 접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매를 맞았습니다.
성당에서는 웃으며 넘기던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서는 그것이 사탄의 장난이라며 저를 훈육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하느님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두려웠습니다.


두 번째는 미국 한인 성당에서 졸았다는 이유로 맞았을 때였습니다.
그저 피곤했던 어린아이의 졸음이 사탄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마음속에서 하느님과 한 걸음 더 멀어졌습니다.


세 번째는, 거리에서 만난 전도자들의 강요였습니다.
“저희 교회에 와야 한다”며 끝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저는 천주교 신자라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제가 “사탄에 씌인 자매”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모든 제도화된 종교에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내게 죄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사탄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불렀습니다.
나는 단지 졸렸을 뿐이었고, 그냥 비행기를 날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자처하는 제도와 사람들 속에서
사랑이 모욕당하는 장면을 너무 자주 마주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빛을 까먹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잊었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추천 성경 구절 – 위선과 단죄의 오용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


고린도전서 1:12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을 따르고, 나는 아볼로를 따르고, 나는 게바를 따르고,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나니”

➤ 이는 바울이 **“너희가 파당을 이루고 있다”**며 크게 우려한 표현이에요.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어지는 경고 (1코린 3:4)

“어떤 사람이 이르되 나는 바울을 따르노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아볼로를 따르노라 하나니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사는 자 아니냐”

➤ 바울은 “그리스도 분열은 육적인 행동이다”라고 단정합니다.
즉, 신앙의 분열이란 결국 욕심과 자기 세움이라는 경고임을 읽을 수 있죠.


추가 인용문

“너희는 사람을 따라 나누어짐이 아니냐? 육신을 따라 사는 자인가?” (고전 1:12 & 3:4 을 요약)


마태복음 23:27-28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 외형적 신실함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믿음일 수 있음.


마태복음 9:13

“나는 자비를 바라고 제사를 바라지 않는다.”

→ 하느님의 마음은 외적인 종교 형식보다, 그 안의 마음과 자비에 있다.


마르코복음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규칙이 사람을 지배하는 순간, 종교는 사랑을 잃는다.


요한복음 8:7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위선을 부수는 예수님의 가장 직설적인 선언.


이사야 29:13

“이 백성은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다음화 : 믿을수 없던 날들, 그리고 멀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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