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의식들
며칠 전 생일을 맞았다. 같은 날 졸업사진을 찍은 친구와 서로를 축하하며 저녁을 함께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반포에 있는 마루심이었다. 마루심은 장어 요리, 그중에서도 일본식 장어 덮밥인 히쯔마부시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다. 히쯔마부시는 일본 나고야를 대표하는 음식이며 보통의 장어 덮밥과 가장 큰 차이점은 먹는 방식에 있다. 우선 그릇에 담긴 덮밥을 사등분해 한 주걱씩 공기에 덜어 먹는다. 옮겨낸 덮밥은 세 가지의 방법으로 먹을 수 있다. 하나는 다른 것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덮밥을 맛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덮밥에 잘게 썬 파, 김, 깻잎과 고추냉이를 곁들여 먹는 것이며 마지막 방법은 오차즈케처럼덮밥에 따뜻한 차를 부어 먹는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방법으로 먹은 후 남은 마지막 사분의 일은 가장 입에 맞는 방법으로 다시 먹는 것이 히쯔마부시를 즐기는 방식이다.
처음 눈을 사로잡은 것은 상차림을 내놓는 방식이었다. 덮밥과 장국, 일본식 계란찜인 짜완무시는 열이 나가지 않도록 그릇 위에 뚜껑이 올려져 있었다. 또 식기도 다양했는데 수저와 함께 덮밥을 나눠 밥공기로 옮겨 담을 수 있는 납작한 주걱이 놓여 있었고 좁고 긴 모양의 그릇에 담긴 짜완무시를 위한 가느다란 숟가락도 따로 있었다. 화려한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곳곳에서 섬세한 배려가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앞서 말한 방법에 따라 먼저 덮밥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첫 느낌에 장어의 겉면이 매우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의 탄 맛과 함께 그 바삭함을 느꼈을 때 장어가 너무 익어 육즙이 날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가 안으로 더 깊숙이 박히자 비로소 기름지고 촉촉한 육즙과 향이 입안을 적셨다. 간을 적당히 머금은 밥알과 장어의 살은 씹을수록 풍미를 돋구어서 두 재료만으로도 뒷맛까지 심심하지 않았다. 입안의 기름기가 과하다 느껴질 때 같이 나오는 피쉬 소스 드레싱의 소스의 새콤함이 텁텁함을 덜어주었다. (의외의 드레싱이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식사를 마칠 즈음에야 이름을 혀끝에서 꺼낼 수 있었다).
샐러드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느끼함이 올라오려 하던 찰나에 딱 맞춰 첫 번째 공기를 비웠다. 이번에는 덮밥과 함께 고명을 덜어 두 번째 히쯔마부시를 시도해봤다. 그리 대단한 차이가 있을까 하면서도 새로운 재료를 넣을 때 달라질 맛이 궁금했다. 앞서 먹을 때와 가장 대비되는 지점은 파와 깻잎, 고추냉이에서 오는 매콤함이었다. 일식을 좋아하면서도 매일 먹기 힘든 것은 느끼함 때문인데 두 번째 덮밥은 그 점을 완벽히 보완해 주었다. 개인적인 취향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지만, 특히 깻잎과 장어의 궁합이 특히 훌륭하게 느껴졌다. 깻잎의 향뿐 아니라 까끌까끌한 식감이 녹을 듯 부드러운 덮밥 속에서 톡톡 튀었다. 세 가지 먹는 방법 중 이번이 가장 좋았다.
세 번째 방법을 눈으로 읽을 때 처음 연상된 것은 이따금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보리굴비였다. 쫀쫀한 굴비의 질감에 밥을 보리차에 적셔 먹을 때 더 순하게 다가오는 숙성된 굴비의 향이 보기와 다르게 중독성 있던 기억이 나 먹기도 전에 기대가 되었다. 보리 굴비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히쯔마부시는 따르는 차 온도가 따뜻하다는 것과 차에 가다랑어를 넣어서 어향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바삭한 음식을 방금 적셨을 때의 씹히는 그 촉촉하면서도 쉽게 바스러지는 느낌은 언제나 즐거운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기름기를 잡아주는 차와 함께 장어를 먹으니 훨씬 덤덤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 방법으로 덮밥을 먹었다면 그 심심함에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장어 맛을 충분히 즐긴 후반부의 식사로는 이 방법이 적격이었다. 강렬한 맛은 없지만, 찻물의 뜨뜻함과 향긋함 때문에 계속 먹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누룽지와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다.
마지막 사 분의 일은 매콤함이 매력적이었던 두 번째 방법으로 먹으려 했다. 공기로 밥을 옮길 때 마시멜로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이전에 밥을 덜 때 신나 장어를 듬뿍 얹다 보니 마지막에는 밥에 비해 장어가 부족한 사태가 일어났다. 사십 분 전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반 정도를 먹은 후 결국 노선을 바꿔 차를 따라 먹었다. 장어가 없으니 심심했지만, 그전에 미처 많은 관심을 주지 못했던 장국이나 계란찜을 곁들이며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몸과 마음이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육신도 배불렀지만 정갈한 상차림에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디너 코스를 먹을 때처럼 덮밥을 먹는 방식이 바뀔 때마다 생기는 기대감이 머리가 제대로 한 끼 먹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 같다. 한강에서 조촐한 축하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뒤늦게 쌓인 축하 카톡에 답장을 시작했다. 뻔한 메시지에 뻔한 말로 돌려줄 뿐이지만 그 귀찮은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때로는 사소하고 귀찮은 것들이 행복을 만든다. 상차림의 섬세함이나 덮밥을 옮겨 담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먹는 수고가 그날 저녁의 맛을 완성했듯이 10초 남짓한 시간이나마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 것과 나도 비슷한 시간을 들여 감사하는 맘을 가진 것은 그날의 마무리로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일생을 지탱해주는 현대의 작은 의식이 아닐까 싶었다.
나이부터 먹을 것은 다 먹은 그날을 소화하느라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는다. 24살도 축하받을 한 해를 살아야겠어.
★★★ 하루가 특별해지는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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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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