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영국인 R과의 대화
치앙마이에 한번이라도 와 본 사람이라면 모를리가 없는 North Gate Jazz Bar. 최근에 여기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P와 친구가 되었다. P가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날에 맞추어 바에 놀러갔다가 요즘 새롭게 준비하는 메뉴인 똠얌칵테일 시음도 하고 꽤 재밌는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바 테이블 옆에 앉아있던 R과도 똠얌칵테일을 나눠마시며 자연스레 이야기 하게됐다. 테이블 끝에 앉아있던 친구 B는 본인과 내가 앞으로 함께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며 R에게 나를 소개했다. R은 영국 런던에서 왔고 은퇴 후 치앙마이에 와 17년째 살고 있다. 치앙마이에서 흔히 말하는 은퇴이민자인 셈이다. 나는 그에게 어쩌다 치앙마이에서 살게 되었는지 물었다.
R은 런던에서 3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단 한번도 쉬지않고 일을 했다. 정말 그 사이 단 한번도 쉬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는 단호하게 단 한번도, 라고 다시 강조해 말했다.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부양해야할 가족들이 있으니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꼬박 내 나이만큼이나 일만 하면서 살았다는 거잖아? 3년 조금 넘게 일하고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31년이라는 숫자가 가늠이 안 갔다. 그로부터 더 들을 이야기가 많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고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인터뷰를 하고 영상으로 남겨도 괜찮을까요? 저는 치앙마이에서 제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거든요."
"얼마든지! 너 참 재밌는 애구나(하하)"
31년 동안 쉼없이 일하고 은퇴 후 이곳에서 17년째 사셨다고 하니 대략 70대 정도로 그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대단하다. 어쩌면 그의 세대에서 이정도 근속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의 노동이 당연한건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3년 남짓 일하면서 항상 그랬던건 아니지만 그 중 약 1년은 나를 잃어버린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 근속하는 동안 그는 얼만큼 본인을 내어주고 살았을까, 얼만큼 많은 위기를 겪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 때 쯤 그가 내게 왜 치앙마이에 살게 됐는지 물었다.
"저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요, 나중에 너무 크게 번아웃이 왔어요. 열심히 꿈을 좇고 열정을 가지고 사는게 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더라구요. 너무 괴로웠어요. 한동안 너무 우울했고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리자. 일도 공부도 하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완전히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뒤섞여 보기로요.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냥 지르고 본거예요."
그러자 그가 축하해! 하며 내게 손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갑자기 우리는 악수를 했고 그가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너는 내가 31년만에 깨달은걸 지금 그 나이에 벌써 깨달았구나. 음, 솔직히 질투마저 나려고 하네. 나도 네 나이에 알았더라면."
글쎄.. 내가 깨달은게 맞나? 뭘 깨달았다는거지? 물론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암울하기만 했던 시기는 지났으니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헤매는 중인걸..
"물론 방콕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나아지긴 했지만 그때의 우울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앞길이 너무 깜깜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 주변에 젊은 친구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혹시 저처럼 힘든 시기를 겪는 친구들에게 꼭 해 줄 말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너희가 깨달아야 할 건 딱 하나야. 너희한테 주어진 길이 절대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길게 생각하지마. 그냥 해. 나는 30년 넘는 세월동안 망설이고 아무것도 못 하다가 뒤늦게 50살 가까이 되어서야 결정했어. 치앙마이에 오고 나서야 겨우 진짜 내 삶을 살기 시작했지."
"처음 여기 올 때부터 이렇게 오래 살 계획으로 오신 거예요?"
"아니 전혀! 원래는 2주 여행으로 온거였어. 근데 와보고 느꼈지. 아, 나 여기서 살아야겠구나. "
R과 나는 웃음이 빵 터져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R은 뒤이어 말했다.
"나 여기 올 때 아무것도 안 가져 왔어. 한 손에 작은 가방. 그거 하나 달랑 들고 왔어. 그게 다야. 그런데 봐. 아주 잘 살고있잖아? 결정은 한 순간이야. 그냥 일단 결정하고 봐. 그러고 나면 다 어떻게든 길이 보이게 되어있어"
사실 이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걸. 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거나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을 내려놓을 용기가 없다는 데에 있다. 결국 용기의 문제.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적절한 타이밍에 포기할 용기, 주변의 압력에 아랑곳 않고 내 길을 갈 용기. 그럼 용기는 어떻게 내면 되는 건데? 이런 의문이 생길 때 나는 R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로 했다.
2주짜리 여행이 17년이 되어버린건 그저 한 순간의 결정. 평생 많은 것을 일궈왔던 런던에서 치앙마이로 넘어 올 때 가져온건 달랑 한 손에 잡히는 가방 하나였다는 사실.
고민해 봐야 답은 없다. 고민의 끝은 결론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을 하는 건 그저 한 순간. 우리가 들이는 고민의 시간과 비례하게 더 좋은 선택에 가까워지면 좋겠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 쥐고있는 것들이 많아 놓기가 아깝다 느껴지더라도 사실 알고보면 한 손에 들리는 가방 하나치 양일 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