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마주하는 오늘이 때로 기대를 배반할 때 그만큼 슬퍼진다. 인터넷 주문이 상식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주문 후 약속한 날에 물건이 도착하지 않을 때 부득불 고객센터로 전화를 돌린다. "폭언하면 처벌한다, "는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차가운 기계음이 먼저 나를 맞는다. 주문한 물건이 오지 않아 궁금하여 전화한 사람이 영문도 모르고 가해자가 되는 순간, 깊은 당혹감에 맞닥뜨린다.
배가 고파 혼자 식당을 찾을 때가 있다. 벽에 붙은 '2인 이상 주문' 메뉴를 보는 순간 나는 불통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섞여있는 모임, 식당이 모임 장소로 정해져 다 같이 들어갔을 때 사람 수만큼 음식 주문을 강요당할 때의 기분은 어떻게 표시해야 할까. '고객 친절'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과 "고객님 사랑합니다." 란 슬로건이 떡하니 출입문에 붙어 있는 집이다. 간판과 슬로건 뒤에 숨은 혼 빠진 강시와 차가운 비합리의 벽에 부닥칠 때 나는 작아진다.
일상의 불합리보다 더 잘 알려져 있는 이름, 부조리를 만나면서 가끔 생각을 깊이 팔 때가 있다. 죽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와는 기어이 이별해야 하고, 꿈에서도 만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과 억지로 마주해야 하는 것은 숙명일까. 해 볼 것은 다 시도해 보고, 그야말로 뼈가 너덜할 정도로 애쓰고 피땀 흘려도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정의는 멀리 있기만 한 듯 보일 때, 나도 너도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만, 세상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지 않는 이 근본적인 간극이나 틈을 '부조리'라 불렀다. 착하게 살았다는 그도 친구의 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고속도로에서 운명 같은 사고로 생을 마감했듯이, 삶은 이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거대한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하지만 카뮈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말고, 그것을 똑바로 대하며 저항하면서 살아가라고 했다. 부조리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작은 실천으로 그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이 있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앵무새 소리만 가득 쟁여 있는 차가운 시스템에 맞서 따스함이 밴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달라 하고, 획일적 규정 대신에 유연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풍길 때 조금이라도 부조리가 들어설 자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무엇보다 서로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작은 친절을 건네며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을 때, 부조리의 싹은 조금씩 시들어가지 않을까. 사랑과 이별,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도 우리 스스로 의미를 찾아 나설 때, 이 부조리의 유전자는 힘을 잃어가지 않을까?
일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는 종종 나를 지치게 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됨을 잃지 않는 지혜를 하나씩 배워가려고 한다. 사실은 사람이 부조리한 게 아니라, 사람이 부조리를 느낄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