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계정 영구 삭제

새 계정으로 초대장 보내렴.

by 상처입은 치유자

"정말 죄책감 계정을 영구삭제 하시겠습니까?"

"YES."

아직도 내 손가락에는 클릭의 소리가 남아 잔잔하게 울리고 있다.


"엄마, 저 국어 공부는 마쳤어요. 엄마 패드를 좀 빌리고 싶어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던 중 아이가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서 말한다. 나는 Ok 사인을 날리며 소리를 내지 않고 "그래! 가져가~"라는 입모양만 만들어 대답을 해준다. 아이도 '네~'라고 입모양으로 대답한다. 조심스레 패드를 받아 들고 방해할 의도는 없었다는 듯 까치발을 들어 올리고 뒷걸음질로 나간다.. 쓱. 문이 닫힌다.


그날따라 수업 중에 눈을 감은 횟수가 많았다. 이마를 한껏 들어 올려보기도 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 눈꺼풀에 힘을 가득 주기도 했다. 그래도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어, 잠시 눈을 감는다는 게 깜빡 졸기도 했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피곤해서 말을 덜 하게 된 건지, 말을 아꼈기로 했기 때문에 더 피곤함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다. 그날의 나는 그냥 말이 없었다. 그래. 능동이든 수동이든 나는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냄새를 맡았다. '엄마가 달라졌다.'


컴퓨터 오른쪽 아래를 보니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아이가 패드로 딴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되찾을 핑계를 찾았다.

"엄마 내일 시험공부해야 해서 패드가 필요해."

여전히... 나는 습관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내 손아귀에 쥐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옮겨 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 시험공부 첫날이라 그런지 좀 힘들었어요."

"그렇구나. 애쓰네. 그리고 엄마 패드가 필요해서."

"잠깐만요. 엄마 이거 보세요. 이 사람 이름이 엄마랑 똑같아요."

아이는 미끼를 던져 나를 당기고 있다. 잠시 끌려가 준다.

"오! 신기하네. 엄마 이름이 흔하긴 하지."

"이 사람이 브이로그를 찍는데요~ 이거 한 번만 같이 봐주세요."

쇼츠니까. 1분 정도만 있자.

"그래! 내 이름이 나오니까 어색해!"

"그렇죠? 아.. 오늘은 쉬고 싶다."

시험 준비 첫날이다. 아이는 다시 미끼를 던진다. 예전 같으면 덥석 물어 아이가 결정할 일을 내가 결정해 줬겠지. 아이는 책임에서 벗어나 엄마 탓을 할 수 있게.

"그럴 수 있지. (시계를 보며) 엄만 이제 시험 준비하러 갈게."

패드를 들고 천천히 몸을 돌린다. 하지만 한 번에, 단호하게.

"엄마 안아주고 나가세요."

네가 눈치챈 모양이구나. 엄마 감정을 확인하려는 세상에서 슬픈 말이다.

'엄마가 침묵을 선택한 건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사랑을 너에게 맞게 빚어 가 닿게 하기 위함이지.'

"그래!!"

꼭 안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준다.

천천히 안방으로 걸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쓱. 그리고 의자에 묵직하게 몸을 올려두고 나서, 쓰지도 않을 패드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나에게도 낯선 느낌이다. 내가 달라진 걸 내가 의식한 것보다 아이가 먼저 냄새를 맡았다.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11시가 다 된 시각. 달라진 공기에 적응하느라 생각 징검다리를 분주하게 옮겨다니던 그 시각. 아이가 빼꼼 문을 연다.


"엄마랑 같이 공부하고 싶어요."

초대장이다. 자신의 불안을 내뿜는 자리에 관객이 되어달라는. 어쩌면 그곳에서 내가 불안의 원인이 되어주길 바라는 지도 모른다. 그녀가 불안을 처리하는 방식은 나에게 그것을 마음 놓고 쏟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두 받아주고 책임을 대신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고. 그 시절을 거쳐 아이는 엄마가 거부하지 못할 초대장을 썼겠지. 어쩌면 그 초대장은 내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아이의 초대장이다.

'지금까지 엄마가 나를 힘들게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엄마가 만회해야 할 게 있어. 엄마가 잘못한 만큼 내 말대로 엄마가 움직이면 되는 거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그때그때 달라. 이해 못 하면 나 화낼 거야. 모진 말도 할 거야. 난 그럴 만큼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난 책임 안 져. 내가 원하는 말을 엄마가 한 거잖아. 그러면 엄마가 책임지는 거지.'


아이는 내가 사랑이라고 포장한 죄책감을 기가 막히게 찾아 뜯어내고 있었다. 누구 아이인지 영악하다.


그랬던 엄마가 초대장 수신을 거부한 것이다. 수취인이 달라졌다. 아이는 주소를 찾아내느라 바빠지겠지. 그래도 못 찾을 것이다. 죄책감이라는 주소는 이제 영구 삭제 했으니까.


죄책감은 어쩌면 엄마가 답이 정해져 있는 쉬운 문제이다. 쉽게 찍고 그 안에서 '나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오구오구, 그랬쪄요?'라는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묵직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계속해서 경계를 설정해야 하고 때로는 내 맘과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처음 보는 논술형 문제처럼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답안에 대한 학점은 오롯이 내가 짊어진다.


"아.. 엄마도 공부해야 하나?"

내가 만든 침묵의 자리에 아이는 선수 치며 말을 내어 놓는다.

"응. 엄마도 당장 내일이 시험이라."

자신의 의도가 읽힌 걸 이번엔 귀로 들었나 보다.

"아.. 공부하기 싫다."

첫 번째 초대장이 되돌아오자, 이번엔 내용을 바꿔 다시 나에게 초대장을 건넨다.

"공부하기 힘들 수 있지."

"엄마 이건 뭐예요?"

"엄마 공부할 교재야."

"하.. 피곤해. 그냥 잤으면 좋겠다. 시험 준비하려니 벌써 마음이 힘들어요."

"그렇구나. 힘들겠네."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그 초대장을 못 본 척한다. 아주 친절하고 고요하게.


"난 엄마 목소리가 싫어."

듣고싶은 말을 듣지 못한 아이는 이도 저도 안먹히자 마지막 승부수를 가장 날카로운 포장지에 싸서 나에게 던진다. 밤송이 같은 말을 가볍게 받아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껍질을 벗겼다. 동요하지 않고 그저 아이의 눈을 편안하게 응시하며.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널 사랑해. 엄마는 너의 곁에 항상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제자리에 여전히, 묵직하게 앉아있었다. 너의 요란한 초대장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방문이 쾅 하고 닫힌다. 문 닫는 소리가 예전보다 작아진 것을 보니 아이가 혼란스러운 것 같다.


'엄마가 새로운 기둥을 단단히 세운걸 확인했구나.'

그렇게 한참을 의자에 닻을 내린 듯 앉아있었다.


쪼르르 달려가 아이에게 "아이고. 화났구나~ 힘든데 엄마가 몰라줘서 속상하기도 하고.." 아이 대신 불안을 처리하던 내가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고마웠어.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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