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었지.
"오늘 해야 할 것을 다 못했어."
때는 한참 성장호르몬이 나온다는 새벽 1시 30분경. 나는 꿀잠 중이었다. 우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진동이 있어 옆을 보니 우리 아이다.
'하아.. 또 시작이네. 일단 잠은 포기해야겠구먼.'
아이는 한창 시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성적표에 찍힌 100이라는 숫자는 아이의 정체성을 만드는 벽돌이다.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굽는 중이다. 성이 아니라 같은 색 벽돌만 있는 무시무시한 감옥일지도 모르는 그 성을 말이다.
이 세상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아이에게는 그 100점이라는 벽돌 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다.
울면서 들어온 아이에게 위로를 시작했다. 일명 '감정코칭 개요'편을 펼쳐 들고 목차를 살피며 휘리릭 훑어 읽으며 대응을 해보았다.
"오늘도 내가 계획한 것을 다 못했어!!! 계획을 다 지키기가 너무 힘들어"
모든 말은 엉엉 울면서 하는 말들이다. 그 처절한 울부짖음을 함께 듣고 싶을 정도이다.
"속상하고 불안할 수는 있는데 계획한 대로 다 못할 수도 있는 거야!"
"아니야~.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내가 이렇게 힘든데!!!!"
"힘든 거 다 알지 얼마나 노력하는 지도. 그럴댄 잠깐 쉬어도 돼. 충분하니까."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왜 마음을 편하게 못해주는데!!!!"
"지금 자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
"아니야!!! 왜 엄마는 몰라!! 난 잘해야 한다고!!!"
"지금은 새벽이고 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게. 일단 충분히 울어"
이 쳇바퀴 대화가 계속되자 난 그냥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응을 안 하기 시작했다. 팔로 아이의 심장 부근을 끌어안아주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이는 내 팔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불안은 나의 팔을 안전한 기지로 생각했을까? '내가 감정을 토해내도 엄마는 옆에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이의 불안은 침묵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마음속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들을 나에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오신다면? 오물을 처리하기 위한 '감정코칭 실전' 편을 펼칠 차례다. 어쩌면 지금은 단호함을 넘어선 서슬 퍼런 냉정함이 아이의 과부하된 편도체의 열기를 식혀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아이가 불안을 격하게 토해낸 이유는, 엄마를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다. 법을 지키기 않으면 사회에서는 제재를 가한다. 그것을 사회에서는 법이라고 하고, 나는 그것을 우리 집의 울타리라고 하기로 했다.
아이가 울타리를 마구 난도질을 하더니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난 이 아이가 도덕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의무를 가졌다. 나는 부모니까.
"그만해. 너 지금 선 넘었어."
"내가 힘드니까 그렇지!"
"힘들다고 모든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건 방학 내내 놀았기 때문이고 네가 잘못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야. 그 안에 엄마의 의견은 없어. 네가 말을 그만하라고 해서 침묵했고, 심지어 네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하면 그렇게 해줬어."
나는 평소 생각했던 모든 말을 이어서 퍼부었다.
"네가 그렇게 엄마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왜 엄마에게 오는 거야? 지금 도와달라고 온 거 아냐? 그럼 도와주는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공부는 인간이 하는 거야. 공부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해. 이럴 거면 공부하지 마. 힘들어서 이렇게 네가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말까지 해야 한다면 엄마는 그거 반대야. 공부 다 때려치워!!"
써놓고 보니 매우 강한 말들이었다. 그리고 이 말들은 아이의 발작버튼이다. 공부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성을 무너뜨리라는 것이니까.
"아니야! 왜 공부하지 말라고 해? 엄마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이젠 안돼. 공부는 인간이 먼저 된 다음 하는 거야. 네가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이러면 마음 편해?"
"아니.."
내 질문에 대답을 했고, 아마도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엄마! 제발 나를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 줘!'라는 작지만 가장 큰 울부짖음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아이는 이제 전두엽의 기능을 회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엄마니까 네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네가 엄마에게 지금까지 했던 그 모진 말은 엄마 안에 묻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 끝내.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마. 너의 그 말과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게 엄마가 할 일이야. 그리고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거야!"
아이의 실수를 품어주고 독립해서 날아가도록 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러셨듯.
아이의 흥분한 편도체가 진정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시간이 꽤 걸렸다. 울기도 했고, 다시 울타리를 넘어오려는 시도도 했다. 그때마다 나의 차갑고 단단한 말로 막아주었다. 아이가 경계를 무단침입하는 범죄자가 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꽤 오랫동안 뜨거운 분위기를 나의 차가운 말로 식혀야 했다. 효과가 좀 있었을까? 다행히도 아이의 전두엽은 회복되어가고 있었고, 나의 말에 더 이상의 아이의 말대답은 없었다.
이대로 해피엔딩이라면... 그것은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이겠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이는 쿵쾅거리며 걷고 앵무새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 그쯤이야. '아이의 편도체 엔진이 꺼지는 소리쯤이라고 해두자.' 라며 모른척해줬다.
슈퍼마리오가 동전을 얻으러 열심히 뛰어다니 듯, 아이는 '100'이라는 숫자를 향해 마구 달린다. 내 눈앞에 저 상자를 쳐서 어떤 동전이든 획득하는 게 중요하다. 혹시라도 벽돌을 빗나가게 쳐서 머리에 혹이 나면? 엄마에게 와서 호~ 해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거고.
내가 언제까지 달래줄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물리적으로 헤어질 텐데. 아이가 스스로 조절하는 법를 가르쳐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나는 아이가 슈퍼마리오를 조종하는 패드를 쥐고 있는 게이머가 되었으면 한다. 게이머에게는 게임 속 슈퍼마리오가 실패해도 또 다른 기회가 있다. 그 실패를 통해 배우고 더 나아지다가 결국 미션클리어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아이는 부모 아래의 슈퍼마리오였다가 이제 게임 밖, 넓은 세계로 나가려는 게이머가 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 내 것이라고 착각했던 아이의 게임 방향키를 원래 주인에게 넘겨줄 시기가 왔다.
따듯한 표정이든, 서슬 퍼런 차가운 말이든 아니면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우리만의 방식으로 아이가 프로게이머로 자라길 바란다. 다른 말로, 나 조차도 엄마 역할이 아닌 나만의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뜻이겠지.
아이도 나도 지금은 그저.. 새로워서 낯선 우리의 컨트롤러에 적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