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단단함

by 상처입은 치유자

6시 27분.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우리 몸에 평안을 주는 저녁식사 시간.


가장 평안한 시간에 대한 기대와 다르게 아이는 나의 눈을 가장 많이 피하는 시간이다. 기대에 대한 크기만큼 나는 슬픔 섞인 씁쓸함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들 때마다 나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 나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침묵으로 들어간 이유는 아이의 요청 때문이었다. 나의 말, 행동 특히 시선은 아이에게 처리할 수 없는 과도한 자극이었나 보다.


나의 어떤 모습이 아이에게 힘이 들었을까. 나를 탓하기 바빴다. 내가 나를 탓하기도 하고, 남편이 나를 탓하기도 했다.


"너는~"이라고 시작하는 나를 평가하는 말들은 나에게 너무도 상처였다. 어쩌면 마주하기 싫은 진실이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조차도 내 무거움이 버거웠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언제나 이유를 찾았고, 분석하기 바빴으며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 힘은 블랙홀과 같아서 나조차도 이기지 못하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쉽게 빠져들어 버리곤 했다.


그 큰 중력을 힘들어한 것은 나의 아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엄마는 항상 뭐가 그렇게 진지해? 이게 그렇게 까지 생각할 일이야?"


아이는, 자신의 힘듦을 가볍게 쳐주는 엄마를 원했을 것이다. 자기보다 자신의 짐을 더 무겁게 빨아들이는 엄마가 너무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빠와의 저녁식사에는 시답잖은 말을 많이 한다. 아이는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없이 가볍게 날려주는 아빠의 반응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아이가 나만 좋아하길 바랐던 나의 욕심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힘든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아이 덕분에 깨닫고 이겨내기는 했다. 그 도움의 방식이 아이가 나를 거부하는 것이었던 것은 여전히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알게 된 것은 아이가 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블랙홀과 같은 중력의 무게를 거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엄마, 나 이제 이것도 끝냈고 이것도 해 냈어요. 나 잘 해내는 사람 맞죠?"

아이는 자기보다 더 큰 무거움으로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을 원한다. 나의 무거움은 그곳에 쓰일 일이었다.

"그럼, 넌 결국 해내는 사람인 걸!"




그래! 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반백년을 나와 함께 살다 보니 사건의 지평선에서 무거움에 빨려 들어가 허우적 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지평선에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나의 무거움은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의 인생에 어느 때는 필요할 것이다.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나의 질량을 원할 때가 있을 테니. 그때 묵직한 단단함으로 함께 있어줄 자신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다. 어쨌건 어느 순간엔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아이가 힘들어하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시선도, 농담이 필요할 때 진지해지는 실수도 그리고 고독과 자발적 소외를 즐기는 나의 성격도. 이 모든 게 이제는 괴롭지만은 않다.


아이는 이런 집에서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가벼움이 필요할 땐 아빠의 깔깔대는 가볍고 청아한 웃음을 찾고, 무거운 닻이 필요하면 나에게 인정을 요구한다. 아주 잘 크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해나가고 있다.




6시 14분.

오늘 저녁 메뉴는 떡볶이이다. 친정엄마가 주신 집간장과 다시마, 표고버섯, 무, 양파 등 신선한 재료로 우려낸 육수를 가지고 나에게 소중한 두 존재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 것이다.


여전히 나의 시선은 무겁고 깊어서 아이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아빠는 아이의 "3일간 감지 않은 머리" 이야기에 깔깔대며 가볍게 웃어줄 것이고, 나는 "아이의 시험기간 공부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무겁게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무거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에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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