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눈뜨고 할 수 없는 일.
아이는 눈을 감은 괴물이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불편하다.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괴물일리 없다.
"엄마 싫어, 엄마 미워!! 왜 나를 낳았어!!!! 엄마는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어! 이 모든 걸 만회해야 해. 엄마는 모든 걸 만회해야 해.!!
아이가 내뱉는 말은 괴물이 하는 말이다. 나에게 향한다. 저 괴물과 싸워야 한다. 너무 불편하다. 아이가 내뱉는 말이 나에게 하는 것만 같다. 맞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는 완벽하다. 내가 해준 첨삭은 완벽하니까. 나의 세계에는 이런 상황은 없다. 괴물이 된 아이에게 나는 더 큰 괴물이 된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되찾고 싶다. 나는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만해!! 뭐가 불만이야!! 왜 나한테 그래!! 내가 도대체 못해준 게 뭔데!"
그 답을 찾는 동안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난 언제나 좋은 엄마였으니까. 보급판 오은영박사님은 나의 정체성이었달까. 오만하게도. 나의 세계에서는 의문은 없어야 했으니까. 모진 말을 하는 아이와 좋은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지독한 죄책감과 짙은 원망은 나를 침묵으로 내몰았다. 내 속이 너무 꽉 차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으로 도망갔다는 게 더 정확하다.
괴로운 침묵 속에서 마주한 건 나였다. 나의 불안으로 아이를 재단하고 있는 나. 우리 아이가 괴물이 된 게 아니었다. 아이는 괴물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래. 이거다. 나의 아이는 나와 싸우는 중이다. 너무 두려워서 눈을 감고 모진 말을 내뱉고 있다. 내 곁에서. 고통스러우니 제발 멈춰달라고.
아이의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기를 찾기 위해 나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괴로움에 몸부림 치며 말을 했을 뿐이다.
아이가 고통을 내뱉을 때마다 나는 아이를 꼭 껴안고 함께 싸워주고자 했다. 어쩌면 내 안의 수많은 말과 죄책감 그리고 내가 내뿜는 불안에 내가 고통스러워 누군가를 붙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 내 소중한 아이의 고통과 공명했다.
그렇게 아이는 나에게 나의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하게 해 주었다. 아이가 불편한 건 엄마가 아니라 내 안의 그 존재였다. 너무도 오래 같이 살아서 잊고 있던 존재.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는 나를 살렸다. 나의 아이가 나를 대신해 그 괴물과 싸워줬다.
가끔 아이의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바꾸려고 빨간펜을 든 그 존재가 나의 허락도 없이 튀어나온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내가 못해준 게 뭐야!! 넌 잘못됐어. 그러니 내가 고쳐줘야 해"
하아.. 아직도 거기 있는 거냐? 그래.. 뭐 방 빼는 게 쉬운 일인가. 다른 집 구할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봐줄게. 아이와 함께 싸우다 보니 그 펜을 든 괴물보다 힘이 좀 세졌나 보다.
전투 때마다 앵무새처럼 외친다. 일종의 주문 같은 거다.
"얼마나 힘들었니. 모진 말을 할 정도로 힘들었구나. 엄마가 여기 있어. 지켜줄게. 여기서는 안전해!"
이런다고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는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이 말은 그래서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안의 차가운 펜을 든 그 존재가 눈치 챙겨서 방을 빼고 나면 내 앞의 소중한 아이는 괴물과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할 일은 그저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아이 옆에 그저 있어주는 것.
어쩌면 나는 엄마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맞다. 난 자격을 갖추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침묵을 선택하자 아이는 자신의 말을 했다. 짐승의 울음으로 살려달라고 외치던 아이는 이제 말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의 자격을 갖추어 가고 있다. 고마운 전투다.
다 내뱉거라. 하나도 남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