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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서 Jun 04. 2019

죄 없는 아기

죄 많은 어른



우리 아기 7~8개월 무렵이다. 우리 아기 이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도 올리지만, 아프게 저 세상으로 갔다는 또래 아이가 생각나서도 올린다. 이 개월수의 아가는 잡고 서거나 기어서 어디든 돌아다니고, 호기심 넘치고, 엄마 아빠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이 사진이 딱 그거다. 잡고 서서 돌아다니다가 퇴근한 아빠 반갑다고 방긋 웃는 사진이다.
정확한 사인은 모르긴 해도 자수한 부모가 진술한 내용보다는 더 끔찍하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나는 그 부모를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겠다. 친모가 임신을 했을 나이를 따져보니 16살, 외국이었다면 14살이다. 친부는 17살이다. 가정사는 알 수 없으나 자명하게 두 사람은 배우지 못했다. 학교는 다녔겠지만 못 배웠다. 책임감과 인내심 같은 것, 부모가 된 다는 것이 어떤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지 같은 것 들 말이다. 그런 가르침은 어른들의 역할인데 그럴만한 부모나 선생님이 주변에 없었던 거다.
가르친다는 건 말과 글로도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절대적이다. 사실은 서른 넘어 아이를 가진 나도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히 최소한의 정신적 무장이 되어있어 버틸 수 있었다. 책임감 있게 키워주신 부모님을 보며 자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어린 엄마 아빠에게는 아기가 울어도, 잠을 자지 않아도, 씻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 조차 주지 않아도 예뻐하고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중심 같은 것을 아무도 심어주지 않았다. 혹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는 것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어른인 누군가가 아기와 어린 부모를 함께 돌봐주었어야 했는데 그마저 없었다.
나에게는 힘들어도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정신적 기초와 든든히 받쳐주는 양가 부모님과 남편까지, 없는 것이 없다. 경제적 압박도 현재로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너무 힘들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몇 초 정도는 해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마냥 나쁜 부모로 몰아칠 수가 없다.
미성숙한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아무 잘못 없는 생명이 온전히 떠안았다는 사실이 처참하다. 하지만 이번 사망 사건에 이렇게 온 나라가 들끓으며 비난 한다는 것은, 아이를 길러내는 일을 사회적 역할이라는 주장의 반증이 되어야 한다. 육아의 책임을 온전히 부모에게 떠 안기기보다 사회적 책임으로 접근한다면, 이번 일 같은 가슴 아픈 죽음을 조금은 더 예방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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