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모의 심리
정인이와 관련된 많은 글을 읽었다. 대부분 비슷비슷한 분노와 주장으로 채워져 있다. 그 와중에 조금 두드러졌던 포인트는, 양모는 아이를 학대하며 얻는 쾌감에 중독되어있었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설명이 된다. 그렇게 정인이를 미워하면서도 파양 하지 않고, 심지어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으면서 옆에 두었던 이유 말이다.
그 작고 여린 아기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한 인간의 이면에 있는 감정의 쓰레기통이었다. 반항이 없고, 말리는이 없으니 그 강도는 고삐 풀린 듯 점점 세졌을 것이고, 죽음이라는 결과 앞에서도 태연했다.
죄책감은 1도 없었을 것이다. 양모는 티비에 출연하고 매일 필라테스를 하고 가슴성형을 하고 와인파티를 하는 사람이다.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있는 분께서 나쁜 짓을 저지르며 그 원인을 피해자에게 씌우는 건 당연지사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쟤가 나를 이렇게 만든다. 나의 행동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 아니었을까?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녀는 폭행을 제외한 자신의 학대 행각을 그다지 숨기지도 않았다. 정서적 학대는 학대라고 생각도 안 한 것 같다. 그 아이는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내 감정의 쓰레기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있는 내 생활에 필요한 '도구',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아이를 물건 다루듯 한 정황도 여럿 포착되었다.
그렇다면 양부는 뭔가? 이런 일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정인이가 죽기 전 날, 양모가 어린이집에서 친딸만 데려간 그 날, 늦게나마 아이를 데리러 가고 품에 안고 한 번 쓰다듬은 사람은 양부다.
하지만 그도 범행에 적극 가담했다.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방식으로 그러했다. 교사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의심을 품은 경찰에게, 의사에게, 보육교사에게 아내의 폭력은 함구했다. 멍은 몽고반점으로, 상처는 아이의 장난의 결과로, 정서적 학대는 아이의 예민함의 결과로 포장하며 아이 탓으로 돌렸다.
나의 추측은, 남편도 아내에게 정서적으로 종속되어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는 멋진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어떠한 세뇌에 빠져있지 않았을까. 내 가정의 리더이자 나의 리더인 그녀가 한 행동이 그릇되었을 리 없다는 환각은 끔찍한 악행이 바로 옆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도록 했다. 정서적으로 종속되었다는 건 그만큼 판단이 흐리고 정신적으로 무기력한 상태라는 뜻일 테니까.
따라서 정인이 입장에서 양부는 살인 공범이지만,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그도 피해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나쁜 길로 빠지는, 실제로는 아주 드문 경우 말이다. 물론 그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법적 피해자는 별이 된 정인이고, 그는 명백한 살인 공범이다. 정인이의 마지막 순간 양모가 양부에게 보낸 '병원에 갈까? 형식적으로"라는 문자만 보아도, 그는 아내에게 그저 살인 방조자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알고 아내에게 힘을 실어 준 든든한 조력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