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나의 눈물을 이해하는가
프롬프트 창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고백성사 창구가 됩니다. 누구에게도 차마 내뱉지 못한 '나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비겁한 질투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력감을 적어 넣고 'Generate' 버튼을 누릅니다. 잠시 후, 차가운 알고리즘이 내놓은 것은 뜻밖에도 나를 품어주는 따뜻한 위로의 선율이었습니다.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 기계적인 연산 장치는 정말 나의 눈물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어느 새벽, 저는 프롬프트 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무력감. 시간은 흐르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답답함.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노래."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습니다. 90초 후,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선율은 놀라울 만큼 제 감정의 결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가사는 제가 쓴 적 없는 문장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가 하고 싶었던 말 같았습니다. 멜로디는 무겁게 가라앉다가도 어느 순간 희미한 빛줄기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그 곡을 들으며 감정적이 되었고, 동시에 당혹스러웠습니다. 이 위로는 진짜일까요?
20년간 미술계에서 일하며 저는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작품 앞에서 우는 사람들을. 이중섭이 가족에게 쓴 편지 그림 앞에서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앞에서 말없이 흐느끼는 사람.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저 그림이 정말 관객의 슬픔을 이해하는가?"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도가 아니라 관객이 거기서 경험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I 앞에서 우는 마음은 어떤 것 일까요?
AI는 눈물의 짠맛을 모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각도, 목구멍에 뭔가 걸린 듯한 느낌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AI가 하는 일은 명확합니다. 제가 입력한 언어 속 패턴—고립감, 무력감, 질투,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을 인식하고, 그 패턴에 대응하는 음악적 구조를 생성하는 것. 통계적 확률의 정교한 배치.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전부'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해란 무엇일까요? 친구가 제 하소연을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일 때, 그는 정말 제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제 상황을 *추론하는* 걸까요? 사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직접 접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어와 표정과 몸짓이라는 외부 신호를 읽고, 그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AI의 반응과 인간의 반응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없습니다.
차이는 명백합니다. AI에게는 주체성이 없습니다. 제 눈물에 '감동받는' 경험 자체가 AI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AI가 생성한 음악이 저에게 위로가 되는 그 순간, AI의 내면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AI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적 경험*입니다.
저는 이것을 "큐레이션적 이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들을 선택하고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창조합니다.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AI는 제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방대한 음악적 가능성의 공간 속에서 제 프롬프트에 가장 적합한 선율과 리듬과 가사를 선택하고 배치합니다. 그 큐레이션이 정교할 때, 저는 "이해받았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해"라는 말을 너무 낭만적으로 사용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내 신호를 정확히 읽고, 적절히 반응하며, 그 과정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만들어준다는 뜻입니다.
그 기준에서 보면, AI는 때때로 놀라울 만큼 저를 이해합니다.
물론 위험도 있습니다. 프롬프트 창이 너무 안전한 고백처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인간 관계의 불완전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회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AI는 저를 판단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으며,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완벽함이 때로는 공허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프롬프트 창 앞에서 계속 고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저는 제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연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 문장으로 만들고, 형태 없는 슬픔에 윤곽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AI가 돌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제 감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합니다. 마치 거울처럼.
프롬프트 창은 고백성사 창구이면서 동시에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는 저를,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기계가 제 눈물을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 눈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