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그대로인데, 왜 가치는 변하는가
Reddit의 r/SunoAI 커뮤니티에서 흥미롭고도 씁쓸한 논쟁을 목격했습니다.
한 유저가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Suno로 만든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었어요. 제 힘든 시기를 완벽하게 표현한 가사 같았거든요. 그런데 댓글에서 누가 AI라고 하니까… 갑자기 모든 게 가짜 같았어요. 제 눈물까지도요.”
같은 스레드의 다른 유저는 정반대로 반응했습니다. “AI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이야? 음악이 좋으면 그걸로 충분해. 셰프가 칼을 직접 만들었는지 안 물어보잖아.”
이상한 일입니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주파수도, 화성도, 가사도 단 한 글자 바뀌지 않았습니다. 변화한 것은 오직 그 노래에 붙은 ’레이블(Label)’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같은 소리를 듣고도 이전과 같은 감동을 유지하지 못하는 걸까요?
# 1 우리는 ‘소리’가 아니라 ‘고통의 무게’를 듣는다
심리학에는 ‘노력의 휴리스틱(Effort Heuristic)’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결과물에 들어간 시간과 고통의 양을 그 가치와 동일시하곤 합니다.
Reddit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이 이 현상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We don’t value art for what it is, we value it for what it took to make it.” (우리는 예술을 그 자체로 평가하지 않고, 만드는 데 무엇이 들었는지로 평가한다)
우리가 인간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전율하는 이유는, 그 3분짜리 곡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수련 기간, 뜬눈으로 지새운 밤, 그리고 영혼을 쥐어짜 쓴 가사의 무게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I가 단 30초 만에 뽑아낸 곡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 감동의 ‘가성비’는 폭락합니다. 투입된 노력이 없으니, 우리가 지불할 감동의 비용도 아깝다고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말 그 곡에는 노력이 없었을까요?
한 AI 음악 프로듀서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나는 Suno로 곡을 만들기 위해 200번 넘게 프롬프트를 수정했고, 각 섹션을 따로 생성해서 DAW에서 편집했어요. 기타 치는 법 배우는 것보다 쉬웠나요? 아뇨. 그냥 다른 종류의 기술이었을 뿐이죠.”
AI가 30초 만에 생성한 것은 맞지만, 수천 개의 결과물 중에서 ‘바로 이 곡’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은 누가 담당했을까요? AI 시대의 창작자는 붓을 쥐지 않습니다. 대신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조각들을 선택하고 배열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형태가 바뀐 것이지, 노력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큐레이터가 수백 점의 작품 중 단 열 점을 고르는 과정에 투입되는 미적 판단의 시간이 결코 가볍지 않듯이, 프롬프트를 다듬고 결과를 선별하는 행위 역시 새로운 형태의 창작 노동입니다.
# 2 예술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닌, 연결의 시도다
예술을 소비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대화’에 가깝습니다. “나도 너처럼 아팠어”라고 말하는 창작자의 고백에 “나도 그랬어”라고 답하는 공명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대화의 상대가 인격이 없는 알고리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청취자는 지독한 고립감을 느낍니다. 나를 위로했던 멜로디가 누군가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도’가 아니라, 데이터가 계산해 낸 ‘우연’이었다는 깨달음은 감동을 배신감으로 바꿉니다.
Reddit의 한 유저는 이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합니다. “AI 음악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는 대화 상대가 없어서가 아니야. 우리가 예술가를 영웅처럼 숭배하고 싶은데, AI는 그 신화를 파괴하거든. 아무도 알고리즘한테 사인받고 싶어하지 않잖아.”
하지만 정말 대화 상대가 사라진 걸까요?
다른 유저는 정반대로 주장합니다. “AI 음악의 진짜 창작자는 프롬프트를 쓴 사람이야. 내가 ‘2000년대 감성의 이별 노래’를 요청했을 때, 그 감정적 방향성을 정한 건 나라고. AI는 그냥 내 의도를 실현하는 도구였을 뿐.”
AI 음악을 듣는 청취자가 대화하는 상대는 알고리즘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음악을 선택하고 제시한 사람’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AI 음악 큐레이터를 구독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은 단순히 기계가 뱉어낸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그 큐레이터가 구축한 음악 세계, 그가 선택한 감수성의 방향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예술가는 “작품을 직접 만드는 사람”에서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하는 사람”으로 정체성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취자가 연결되어야 할 ‘인격’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그 인격의 역할이 생성자(Generator)에서 큐레이터(Curator)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 3 ‘해킹당한 감정’에 대한 방어 기제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공포일지도 모릅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슬픔’과 ‘위로’라는 감정조차 기계가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 말입니다.
AI가 만든 노래를 쓰레기라고 치부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복제될 수 없어”라고 외치고 싶은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릅니다. 내 깊은 내면을 건드린 존재가 기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의 존엄성마저 수치화될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방어적으로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Reddit의 한 댓글은 이 두려움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If an AI song made you cry, the AI didn’t manipulate you—it revealed what was already inside you. The algorithm didn’t create the emotion, it just found the frequency that resonated with your existing pain.”
AI 노래가 당신을 울렸다면, AI가 당신을 조종한 게 아니라 당신 안에 이미 있던 것을 드러낸 겁니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창조하지 않았어요, 단지 당신의 기존 고통과 공명하는 주파수를 찾았을 뿐이죠.
프레임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이 ‘해킹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정이라고 믿었던 것의 일부가 사실은 패턴이었음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AI는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보편적 패턴을 드러냅니다. 단조로운 멜로디에서 슬픔을 느끼고, 장조의 화성에서 희망을 읽는 우리의 반응에는 분명 계산 가능한 요소가 있습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재발견할 기회입니다. AI가 포착할 수 있는 패턴의 영역과, 여전히 AI가 닿을 수 없는 고유한 인간 경험의 영역이 어디인지 더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4 우리가 진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과거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화가들은 사진을 ‘영혼 없는 기계의 장난’이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진가의 셔터 뒤에 숨겨진 시선과 철학을 예술로 인정합니다. 기술이 이미지를 생성하지만, 그 기술을 빌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AI 음악도 지금 그 과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순수한 감동’이 아니라, ‘창작자를 신격화할 권리’인지도 모릅니다. AI가 3분 만에 만든 곡에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우리가 지금껏 예술가의 고통에 지불했던 감동세가 얼마나 과도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권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순전히 ‘이 소리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만으로 예술을 판단할 자유를 얻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알고리즘이 계산한 화음일지라도, 그 순간 당신이 느꼈던 위로의 실체만큼은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만들었는가”를 넘어, “그 결과물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를 다시 정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