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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21. 2022

엄빠라는 이름의 나_2

한부모 역할 정체성

"어머님 안녕하세요? 유치원입니다. 보내드린 신청서가 안 와서요. 작성하셔서 내일까지 제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체험학습 신청서 말씀하시나요? 소식지 뒤에 붙어 있던 체험학습 신청서는 작성해서 지난주에 아이 가방에 넣어 보내드렸는데요."

"어머님 이번 달은 가정으로 나간 신청서가 두 가지였어요. 체험학습 신청서 앞 장에 상담 신청서가 붙어 있었거든요. 확인하시고 내일 꼭 보내주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온통 양가로 도배된 엄마 역할 성적표를 받아 든 것 같아 부끄러웠다.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전화하셨을까, '네'하고 끊었으면 될 걸. 유치하게 이번에는 제대로 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가? 제대로는 무슨? 완전 허투로다. 


아이들과 함께 살림살이 몇 가지만 챙겨 도망치듯 친정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내 삶에서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고, 아이들 등하교를 책임져줄 든든한 조력자도 생겼다. 이혼 전에 비해 몸 쓰고 마음 써야 할 일이 줄었는 나의 하루는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간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출근, 퇴근하고 집에 오면 7시, 친정엄마를 도와 저녁을 차려먹고 똥이 공부를 조금 봐주고, 중간에 산책이나 블록놀이 등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해준 다음 씻기고,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9시 30분 즈음 잠자리에 들면 공식적인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에서 보내주는 안내문이나 유치원 소식지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장 짜리 안내문은 똥이가 문제집 푸는 사이 그나마 성의 있게 읽는 편인데 빵이 유치원에서  일고 여덟 장 짜리 소식지는 꼼꼼히 다 읽을 수가 없다. 아이들 얼굴이 박힌 표지를 넘기면 월간 교육계획이 나오고 그다음이 식단표, 식단표 다음이 식품 알레르기 관련 안내, 그다음이 아동학대 관련 안내문.... 몇 장 읽다가 포기한 적이 많다. 정말 중요한 행사는 알림장 어플에 따로 공지가 되거나 알림이 오기 때문에 그걸 보면 된다 싶어 성의 있게 안 보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가 받아온 소식지를 제대로 보지 않고도 아무 탈 없이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 몇 달 전 유치원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유치원입니다. 체험학습 신청서를 안 보내주셔서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따로 받은 신청서가 없었는데요. 언제 보내주셨을까요?"

"이 달 초 배부되었던 소식지 맨 뒷 장에 붙어 있었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챙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소식지 안 읽어보는 엄마라는 걸 들킨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마치 환경미화 시간에 선생님께서 중점을 두고 검사하시는 위치를 알게 된 것도 같았다.


'유레카!! 찾았다.'


그다음 달부터 아이 가방에 스테이플러로 묶여 있는 소식지가 들어오면 탁 뒤집어 뒷장만 뜯어내 읽었다. 신청서가 첨부되지 않은 달은 애먼 소식지를 뜯어내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착실한 엄마인 척하며 무사히 몇 달을 지났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들통난 것이다.


하지만 항문외과에 광고지에 적혀 있는 그 흔한 문구처럼 '부끄러움은 잠시 뿐', 이내 잊어버리고 살았. 그리고 지난 주말, 부끄러움을 잊은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제목은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 알고 보러 간 건 아닌데 까투리네에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어디 있는지 왜 안 보이는이유가 드러나진 않지만 아빠 없는 5인 가족 체제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까투리네 가족. 아파트 건립으로 파괴되어가는 숲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험난한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꺼병이들과 지혜롭고 현명한 까투리 엄마는 끈끈한 가족애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예상 밖의 전개란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인 까투리 엄마의 성격은 매우 세심하다. 행렬의 맨 뒤나 앞에 서서 이탈하거나 뒤쳐지는 꺼병이가 없는지 살피는 것은 기본, 힘들거나 위급한 순간이 닥쳐도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꺼병이들의 마음을 챙길 줄 안다. 숨바꼭질 놀이를 가장해 길냥이들의 추격을 피하는 부분에서는 그 옛날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엄마 까투리는 그야말로 이상적 엄마의 표본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들 유치원 소식지 하나 제대로 못 읽고 태풍에 아이들이 쓸려갔는지 날아갔는지 한 번도 챙겨보지 못한 나란 엄마와 까투리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저나 나나 남편이 없기는 매한가지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 엄마일까?


이혼 후 나는 아이들이 아빠 없는 가족형태에 위축되지 않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다른 아빠들 못지않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많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아빠들만큼 돈을 벌고, 다른 아빠들만큼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유치원 소식지 대신 경제 뉴스를 정독했고, 아이들 책을 읽어주기보다 내 책을 읽는 집중했다. 정당한 논리와 규율에 바탕을 둔 가풍과 더불어 안정적 심신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을 아빠 없이 만들어내고 싶었다. 표현력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 내 자식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사회적 경제적 방어막을 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의  능력으로 실현 불가능한 꿈을 꿔 가는 동안 '엄마'는 껍데기만 남기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하여 지금 아이들 앞에는 엄마 역할도 아빠 역할도 낙제인 반쪽짜리 엄빠가 남게 된 것이다.


나는 요즘 부쩍 한부모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 까투리처럼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멋진 아빠의 기준을 충족할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 역할과 아빠 역할에 어설프게나마 균형을 맞춰가는 게 이혼이라는 선택을 한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때 영광으로 여겼던 엄빠라는 이름이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주홍글씨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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