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 가족센터 홈페이지에서 센터 이용 수기를 공모한다는 공고를보았다. 센터 이용 경험이 있는 가족이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는 문구 아래에 입상 순위에 따른 상품 소개가 상세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공고문을 본 즉시 어떤 경험을 소재로 어떻게 글을 쓸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글의 설계도를 몇 번이고 그려보았겠지만이번엔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상품이 크지 않아서도 아니고 지원 자격이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브런치 북 출간 프로젝트에응모를 마치고 난 바로 다음이라 진이 빠지기도 했고, 무엇보다응모 과정에서 나의 글이 모자라다는 사실을자각하게 된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참신하지도, 세련되지도, 세밀하지도 않은 글을 이곳저곳에 뿌리고 다니는 일이 소음공해에 버금가는 활자 공해를 일으키는 것 같아 스스로를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뜻깊은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 혼란과 아픔을 불러온 과거의 나를 만나고 화해하려는 노력, 남은 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모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내게 있어 글쓰기는마음의 건강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기에초창기 나의 글솜씨도운동을 갓 시작한 사람의 움직임마냥어설프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입증이나 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어떤 글은 내 눈에 상당히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이렇게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마음이 건강해지는 신호라고 받아들이고 말았으면 좋았을 걸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청자를 찾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브런치라는 트인 공간에 글을 써 올리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제법 많은 분들이 내 글을 읽어주셨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아물어 갔다. 즐겁고 행복했다. 그것은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얻는 즐거움과 또 다른, 내가 꽤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환상에서 비롯된즐거움이었다. 문제는 이 환상이 노력이라는 미명을 만나 이루지 못할 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 위로받고 타인의 공감까지 얻을 수 있는 이상적인 글쓰기를 박차고 출간 작가라는 무모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출간 프로젝트 응모에 매달렸다. 하지만응모를 끝낸직후나는기진맥진쓰러졌고,읽고 쓰는데있어서도 반불구 상태가 되었다. 글을 집중해서 읽기 힘들었고, 한 장 짜리 보고서도 제대로 끝내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초체력이 부족한 사람이 작은 달리기 대회에서 완주한 이력만 믿고 42.195km 풀코스 마라톤에 출전한 격이었으니 중도에 실신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런 암흑기를 지나 서서히 읽는 능력을 회복할 때 쯔음, 최은영 작가의 소설 <밝은 밤>을 만났다.
작가의 섬세한 표현력, 따뜻하고 정돈된 문체, 소설 전체를 감도는 잔잔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는오묘한 빛을 발하는 표지와무척이나 닮아 있었다.나는 일정 부분 내 이야기 같고, 일정 부분 내 엄마의 이야기 같은 이 소설을읽으며많이울었다.그런데소설 속 그녀들의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고, 그런 마음이 커져갈수록 기력이 조금씩 회복되는 걸 느꼈다.이상한 일이었다. 무리한 글쓰기로 인해 기력이 소진한 사람이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생기를 얻어 가다니..... 나에게 다소 변태스러운 기질이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의 변태적 기질을 규명하기 전에분명히알게 된사실은나란사람이 이야기를 사랑하고 아끼고, 즐긴다는 점이었다.혼자서도 할 수 있는 글쓰기는사람에 치이고 닳은 내가 상처입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했고,쓴 이야기 가운데 일부는 어딘가에 떠나 보내기도 했다. 나를 떠난 이야기가 어쩌다 선물 보따리라도 안고 돌아오는 날이면식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야기는 그렇게 점점 몸집을 불리며 퍼져나갔다.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나였지만 그걸 멈추지 않게 한 것은 자꾸만 퍼져 나가려는 이야기의 속성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나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글솜씨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에 대한 핑계를 이렇게 찾았다. 그리고 한 달 남짓한 방황을 끝내고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내게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되며, 더 나아가 선물이 되고, 내 새끼들 입에 들어갈 쌀 한 톨이 되어줄 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