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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Dec 30. 2022

탈락의 기회

이혼 희망타운 대신 모두의 희망타운으로

어렵게 연애를 시작했는데 괜찮아 보이남자친구에게서 자꾸만 안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주변에 멋진 남자들이 갑자기 나보고 좋다고 난리들이니 멀쩡해 보이던 남자친구가 이상해 보이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남자친구가 결정적 실수를 한다. 헤어지자고 말할까? 그냥 조금 더 만나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남자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넌 아웃이야."


한국주택토지공사로부터 온 장문의 메시지를 받아 본 내 마음이 딱 저랬다. 헤어질까 말까 고민 중인 상대로부터  예고 없는 이별통보를 받은 상황.


[울산다운 A-9블록 신혼희망타운 부적격 소명 안내]

귀하께서는 울산다운 A-9블록 신혼희망타운 공공분양 부적격 당첨자로 판정되어 '부적격사유 통보 및 소명자료 요청' 문서를 등기발송하였습니다.

부적격 내용 및 소명신청서, 소명 방법, 제한사항 등을 확인하시어 2022.12.28.(수)까지 소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적 금리 인상 기조에 따라 아파트 값이 줄줄이 하락하면서 집값, 물가 모두 비싸기로 유명한 울산에도 매력 있는 매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던 나의 분양 아파트가 가성비, 가심비 모두 만족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나의 당첨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가출 사건까지 겪고 나니 당첨 포기를 하는 게 맞다 싶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 어렵게 내린 결정인데 쉽사리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불과 이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세상이 올 거라는 걸 아무도 몰랐듯, 몇 년 뒤 부동산 상황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들어가 살든 안 살든 신축 분양아파트 잡아 놓는 게 맞는 것도 같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계약서 작성일을 보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컴퓨터 앞에서 문서를 기안하며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내게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부적격 문자가 왔다. 이 집을 계약하고 말고의 결정권을 너 따위에게 주지 않겠다는 듯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메시지였다.


신혼희망타운은 무주택 여부, 청약통장 가입기간뿐 아니라 재산 등 검증 요건이 까다롭다 보니 주식 가격이나 내 명의로 가입된 보험의 해지 예상금액 등이 합쳐지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은 했지만 실제로 부적격 판정을 받을 줄은 전혀 몰랐다. 결정하고 고민할 것도 없이 기회를 잃어버린 격이니 약간 억울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나는 분명 무주택자에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줄줄이인 박봉 직장인인데 재산초과 및 주택보유를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다니.....


하지만 오밤중에 찐 분홍색 외투를 챙겨 집을 나갔던 할머니의 가출 사건 이후로 무조건 할머니랑 같이 살 거라는 빵이, 아파트에서는 죽어도 못 살겠다는 엄마, 이혼하며 팔아버린 넓은 마당이 있던 주택을 항상 그리워하는 똥이 까지 모두를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뭐가 더 나은 것인지 재다가 아무것도 놓지 못하고 끙끙거릴 나란 사람을 하늘이 너무 잘 알기에 온통 파랗게 멍들어 주저앉은 내 주식들을 재산조회 시점에 잠깐 홍조를 띠며 일어서게 한 것일 테다. 그리고 이미 몇 달 전에 팔아치운 주택의 소유권 이전이 조금 늦어지도록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것일 테다. 


주식 가격은 지금 바닥을 치고 있고, 소유권은 새 주인에게 말끔히 넘어간 상황이지만 나는 마술의 실체를 굳이 밝히지 않기로 했다. 엄마, 똥이 빵이의 손을 잡고 모두의 희망타운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보기로 한 것이다. 멀고 먼 그 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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