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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Feb 03. 2023

스킨십의 질(하)

스킨십에도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사람을 웃게 하고 울게 하며 그러다 낫게도 하는 이야기의 힘을 믿기에 모자란 재주를 끌어다 꾸역꾸역 글을 쓰고 시간을 쪼개 남이 쓴 글을 읽어 나간다. 다시 말하면 기억하고 정리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을 거치며 아픈 기억들이 난로의 등유처럼 연소해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글을 쓰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기 위해 글을 읽는다.


하지만 어떤 아픔은 들추어내는 것만으로 또 다른 아픔이 되듯 내게도 너무 아파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이자 불쌍한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그동안 미뤄왔던 글쓰기 숙제이자 내 삶에서 꼭 태워버려야 할 이야기 시작해 보려 한다.


스킨십에 대한 나의 기억에서 전남편이 삭제된 것이라면 그녀는 처음부터 없었다. 나를 낳아 길러주고 나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녀 스킨십에 관한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버려지고 떠넘겨진 그녀의 삶 속에 스킨십은 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본 일 없는 명품 가방이나 보석 같은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으어~엉. 으어~엉. 엄마. 할매가 또 나 괴롭혀."

"아이고~! 문둥아! 할매가 언제 괴롭히대? 이삐다꼬 그랬지. 너거 어마이가 들으면 지 없을 때 저거 새끼 맨날 우짜나 안 싶겠나?"


빵이가 울며 방문을 연다. 옷을 갈아입던 나는 가랑이 한쪽을 끼우다 말고  빵이를 안아 달랜다.


"우리 빵이 아팠어?할무이가 빵이랑 장난 치고 싶었나 봐. 근데 너무 힘이 세서 우리 빵이를 아프게 했네. 할머니한테 조심해 달라고 이야기해. 어여 가."


훤하게 드러난 엄마의 허벅다리를 조물딱거리며 마음이 풀린 빵이가 눈물을 닦고 할머니에게 달려간다.


"할매! 앞으로 조심 좀 해 줄래? 나 여기 할매가 꼬집어서 아팠거든!!"

"내가 언제 꼬집대? 이삐다꼬 그랬지."

"흥!"


표면적으로 둘의 화해는 무산 됐지만 나는 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똥이는 바닥이 차갑다며 할머니 허벅다리에 앉아 응석을 부릴 것이며 그녀는 깨물고, 꼬집고, 쥐어박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조금만 살살하라고 소리를 지를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그러니까 나의 엄마는 지금까지 내 머리를 쓸어주거나 내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거나 내 등을 토닥여준 일이 없다. 사고로  년을 병원에 누워있다가 돈 한 번 제대로 벌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빠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늘 바빴다. 시장을 보러 가고, 장사 준비를 하고, 손님을 맞고 그러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 위해 빨래를 하고 밥상을 차렸다. 남는 시간은 옷을 꿰매 입고, 못을 달궈 찢어진 고무슬리퍼를 노끈으로 엮으며 다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늘 달려야 했던 엄마에겐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어루만질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그냥 엄마가 우리를 많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엄마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엄마가 몇 년전부터 내가 드리는 용돈과 매달 나오는 소액의 국민연금과 통장의 잔고를 밑천 삼고, 이혼한 딸년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명분 삼아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에게 젊어서 가지지 못했던 시간이 비로소 생긴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한 자리에 앉아있을 시간, 사랑하는 이들을 쓰다듬고 어루만질 시간 말이다. 시간이 생기니 엄마는 스킨십에 굶주린 사람처럼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킨십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엄마의 그 스킨십 기술은 너무 어설퍼 항상 아이들의 눈물을 만들고 엄마와 나의 다툼을 불러내곤 했다.

 

꼬집고 때리고 찌르는 대신 부드럽게 쓸어주고 살포시 안아주면 될 것을, 아이들의 눈물바람으로 끝나는 스킨십 잔치가 못마땅했고 이런 야단법석을 만든 장본인인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울다가도 십 분도 안 돼 할머니한테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살살하라는 나의 잔소리에 돌아서서 눈물 훔치는 엄마를 보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젖먹이 때 버려져 입양되었다가 대여섯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파양 되어 이 집 저 집을 돌았던 엄마에게 부모의 스킨십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어린 엄마에게 따뜻한 손길을 전해 준 가족이 단 한 명(내게는 돌아가신 아빠가 그 한 명이었다)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했을 것이다. 글을 적다 보니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손주들에게 주기 위해 애쓰는 엄마의 노력이 눈물 나도록 고맙고 아프다. 오늘은 기필코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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