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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Apr 21. 2020

인간의 조건

노동의 고귀함에 대하여

최근 감명 깊게 읽었던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를 통해 알게 된 또 하나의 책.

https://brunch.co.kr/@azafa/112


'인간의 조건'을 읽었다.

[인간의 조건_한승태 지음_시대의 창 출판사]


책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세상의 다양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한다.

이 책이 딱 그렇다.

꽃게잡이 배부터 돼지농장, 비닐하우스, 공장까지.

직접 해보라고 하면 쉽게 하기 어려운 일들을

저자의 생생한 표현력을 통해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간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표현들을 적어본다.

이 표현들은 단순히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적는 것을 넘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사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1) 퀴닝(Queening)

 다수의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이다. 노력한 만큼 삶이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말이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체스 게임에서 감지할 수 있다. 체스의 졸은 한 번에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못하는 절름발이 말이지만, 그런 졸이라 해도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여왕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 규칙의 정식 명칭은 승진(Promotion)이지만 주로 가장 강력한 여왕으로 바꾸기 때문에 여왕(Queen)이 된다는 의미의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나와 함께 일하고 생활했던 사람 모두가 퀴닝적(?)이라고 부를 만한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인간이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선 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평생 졸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나는 조금 두려워진다.


2) 배가 뒤집힐 때

"니 배가 어떨 때 뒤집히는 줄 아나?"

"... 지금 같은 때요?"

"파도 높다고 다 배가 뒤집히는 거 아니다."

"그럼요?"

"배가 뒤집히는 건 있다 아이가, 파도를 피할 때 뒤집히는기라."

"피하다가요?"

"그래.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배도 무게가 있고 길이가 있어서 쉽게 안 뒤집힌다. 근데 초짜 선장들이 겁먹고 도망갈라꼬 배 돌리다 배 옆구리에 파도 맞으면 고대로 넘어가는 기라."

"..."

"니 뭔 말인지 알긋제? 아무리 파도가 세도 뱃머리로 부딪치면 배 안 뒤집힌다."

 파도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졌다. 그가 직감적으로 내게서 대책 없는 인생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선원 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그 마지막 말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다.


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매주 한 번씩 들르는 슈퍼바이저는 접객 관련 불만 신고가 줄지 않는다며 언제나 투덜거렸다. 그는 어떤 손님이 알바와 다툰 일을 회사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회장님이 그걸 읽으시곤 해당 편의점이랑 계약을 해지하라며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들려줬다. 모든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적힌 어깨띠와 녹슨 못을 박은 각목을 하나씩 지급한다면 손님과 종업원 사이의 싸움이 획기적으로 감소하리라 생각하지만, 서비스 업계가 이런 혁신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만한 안목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4) 사장님은 장님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돼지 똥을 뒤집어쓰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한 달 마스크 세 개를 지급하면서도 수완 좋은 경영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는 어째서 이들이 회장님, 사장님, 부장님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실제로 장님이었다. 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며 먹고 사는지만 고집스럽게 보지 못하는 선택적 시각장애인.

 처음에는 간부들의 이기심과 뻔뻔함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개인들을 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과장은 부장의 지시를 따르고, 부장은 이사의, 이사는 사장의 지시를 따른다. 사장이라고 모든 결정을 자유롭게 내리는 건 아니다. 사장은 주주의 부하, 다르게 말하자면 이윤의 말단 직원일 뿐이다. 매출이 줄어들면 사장이라 할지라도 대심문관의 질책을 피해 갈 수 없다. 이사회에서 그가 이단이라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여느 직원과 다름없이 사장도 불붙은 장작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아무리 사장이라 해도 대차대조표의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건 점심 메뉴 고르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5) 이웃사촌

 "그래도 난 운이 좋아. 근처 사람들이 다 착해. 농사꾼은 봄 되면 다 돈이 모자라. 그래도 올해는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 숙소다 뭐다 짓는 데 헛돈 들어간 게 많아서, 또 빚졌지. 우리 집 차가 중곤데 그게 고장이 자주나. 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되는데 차 고장 나면 어떡해? 그래서 차를 바꾸기로 했어. 그래서 마누라 보고 윗동네에 친척집에 좀 가보라 그랬지. 그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묻더래. '돈은 어디 쓰려고?' 그래서 애 때문에 차를 하나 사야 될 것 같다고 하니까. '그럼 또 중고로 사려고? 중고로 살 거면 돈 안 빌려줘. 새로 하나 사, 갚는 거 걱정하지 말고' 그러드래."

 이곳에선 이웃이 곧 소액대출 창구였다. 아저씨가 마을 사람들 일을 자기 일처럼 대하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6) 대접받은 만큼 일한다

 "이 동네는 특히 그런 게 있어. 주인집이랑 일꾼들이랑 선이 딱 갈라져 있거든. 밥 먹는 것부터 딱 나눠져 있어. 같이 일하고 끝나도 절대 같이 밥 안 먹어. 일도 지시만 하고 자기는 안 하지. 나는 안 그래. 무슨 일이든지 대접받은 만큼 하게 돼 있어. 당연한 거야. 사람 마음이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내가 사람 들일 준비를 다하고 너를 받았으면 좋았는데 그러질 못해서 미안해. 방 안에 수도나 온수 같은 것도 되도록 해줬으면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네. 지내는 동안 편의는 다 챙겨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 지내는 동안 편의는 다 챙겨주고 싶은데 미안해. 한 달을 일하든 얼마를 일하든 상관없어. 일찍 그만둬도 우리한테 부담 가질 것도 없고 미안해할 것도 없어. 아직 젊은데 가족이나 친구들이 연락해서 좋은 일 소개해 주면 가야지. 그냥, 가기 한 열흘 정도 전에만 얘기해 줘. 그러면 우리도 다음 일을 계획할 수 있으니까."


7) 젊은 사람들의 눈높이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돈만 밝히고 힘든 읽은 안 하려고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젊은 사람들이 피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누군가는 최악의 생활환경에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그런 생각은 엄하게 훈육받은 아이들이 장래에 성공한다는 믿음만큼이나 헛소리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왜 누군가는 항상 고통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어째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들만이 이 엉망진창인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8) 최저임금제도

 나는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누구를 위한 규칙인지 이해했다. 최저임금제가 노동자를 위한 제도라는 생각이야 말로 지독한 환상이다. 최저임금은 궁극적으로 고용주들이 이 말을 내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봐라! 뭐가 문제냔 말이냐? 나는 법대로 지불했단 말이다!"

 그의 말 뒤에 생략된 문장은 '그 돈으로 먹고살건 말건 그건 내 알바 아니다'이다. 최저임금제란 정부가 고용주에게 발급해주는 연말 정산용 면죄부일 뿐이다.


9) 그립다. 마음으로 본다.

 그녀는 중국인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수첩을 꺼내 한국어 문장을 쓰고 발음해보곤 했다.

"많이 그림 왔어요."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많이... 많이 보다? 보고 싶다 왔어요?"

"아, 그립다고요? 그립다는 속으로, 마음으로 보고 싶을 때 쓰는 거구요. 보다는 진짜 눈으로 볼 때. 여기 탁자가 있잖아요. 나는 이 탁자를 보지만 이 탁자를 그리워하진 않아요."

"아, 알겠다. 그립다. 마음으로 본다. 보다. 눈으로 보다. 나 우리 아들 많이 그리웠어요."


10) 기계도 사람 대하듯

 한 번 험한 꼴을 당하고 나면 기계 앞에서 겸손해진다. 그날 이후로는 앞치마도 비닐장갑도 사용하지 않았다. 기계가 나보다 강하다는 걸 진심으로 승복한 결과였다. 나는 기계도 사람 대하듯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계를 함부로 다루면 언젠간 기계도 똑같이 인간을 대한다. 동료를 열 받게 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기계를 함부로 다루는 건 위험한 짓이다. 이곳은 의심의 여지없는 개떡 같은 작업 환경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생산량보다 나라는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손을 품어준 후 웅이 형이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쪼금쪼금 해. 많이 안 해도 괜찮아. 하루 열 개만 해도 돼. 다치지 마, 알았지? 다치지 마, 다치지 마."


[책장을 덮으며]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제일 힘들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현재의 내 상황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한승태 작가님의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나니, 현재의 내 삶이 얼마나 풍족한지, 그리고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알 수 있었다.


 꽃게잡이 배, 양돈장 등은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의 강도였다. 그리고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해내며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매일같이 욕하는 내 주변 환경(=정확하게는 내 근무환경)이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저자의 이야기가 맞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그 원동력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동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많이 바꿔 준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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