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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May 23.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이 시대의 거장. 이어령 작가님의 이야기를 담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삶에 대해 일깨워주시는 이 시대의 석학. 이어령 작가님의 삶에 대한 통찰, 후세에게 알려주는 삶의 지혜에 대해 적어 봅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_ 김지수 지음 _ 열림원 출판사]


1) 스승이란 무언인가?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몽테뉴가 그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그랬다. 멘토나 롤 모델, 레퍼런스가 아니라 정확하게 호명할 수 있는 스승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애틋하게 묻고 답하며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2) 논문의 정체성

"논문의 정체성은 발견이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낸 것. discover는 cover를 벗기는 거야. 재미난 것은 아메리카 대륙 찾아낼 때까지 '발견'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거네. 디스커버는 포르투칼어에서 왔어. 그러면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떨 것 같나? 독창적이라는 건 사실 뻥이라는 얘기야. 너 혼자의 얘기라는 거지. 개성, originality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 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3) 인터뷰는 상담이다.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데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군인들이 전투할 때 왜 위복을 입겠어? 살기 위해서 감추고 색을 바꾸는 거지.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이 아니라 상담()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지수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4) 자연계, 기호계, 법계

 중앙분리대는 기호가 아니라 물질이거든. 반면 중앙분리선은 물질이 아니고 기호이고, 똑같은 분리의 역할을 해도 콘크리트로 중앙분리대를 만들어 못 가게 하는 것은 자연계로 규제하는 것이야. 반면 선이라는 기호를 긋는 건 법으로 금지하는 거지. 기호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거든.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야.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어.


5) 소설 쓰시네요.

 법의 잣대로 볼 때는 '소설 쓰시네요'라는 말이 얼마나 비웃는 얘긴가. 법으로 보면 소설이 가소롭겠지만, 소설계에서 보면 법이야말로 웃기는 말장난이야. 소설이 진리에 더 가깝지. 법은 내일이라도 바뀌어. 지역에 따라 달라져. 여기선 불법이 저기선 합법이지. 그게 무슨 진리인가. 그런데 소설로 쓰여진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전쟁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마치 내 비극의 가정사처럼 느껴지거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인데도, 내 형제자매 같지. 그게 기호계의 힘이야. 그래서 나는 답답하다네. 과학 하는 사람, 정치 하는 사람, 경제 하는 사람이 문학을 알아야 해. 교양으로 인문학 하라는 게 아니야. 인문학은 액세서리가 아니라네.


6)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는 하늘을 날 때는 눈부시지만, 날개가 커서 땅에 내려오면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 거려. 사람이 와도 도망 못 가고 쉽게 잡혀서 바보새라고 한다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알바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되는 거야. 그게 예술가야.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지 못해.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야. 시인 보들레르처럼, 이상처럼. 그들은 알바트로스에서 자기를 본 사람들이지. 지상에서 호랑이처럼 늑대처럼 이빨 있고 발톱 있고 잘 뛰는 놈이라면 예술가가 되겠나. 알바트로스니까 예술하는 거야.


7) 정신병의 두 가지 종류

 정신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네. 정신분열증(schizophrenia)과 편집증(paranoia)이야. 흩어지는 게 정신분열이고, 집중하는 게 편집증이라네. 모든 인간은 다 정신분열과 편집중적인 증세가 있어. 심각하냐 그렇지 않느냐만 다르지. 자네가 지금 이야기하는 시야, 시계는 그것과 관련이 있네.

 편집증적인 면이 강하면 시야가 좁아. 하나의 점을 향하지. 눈이 앞에 달린 사람들 있지? 그런 사람들이 점을 보는 사람들이야. 동물은 늑대, 호랑이, 사자야. 앞쪽에 눈이 달려 있지. 예를 들면 사자는 먹이를 쫓아갈 때 전부를 쫓지 않아. 한 마리만 쫒아가지. 눈이 앞에 헤드라이트처럼 달려 있는 거야. 반면 사슴, 소, 말은 옆에 달려 있어. 쫓는 놈은 목표물을 향해 달리지만 도망가는 놈은 이리저리 봐야 해. 시야가 넓어야 하지. 어느 놈이 습격하나, 어느 길이 열려 있나, 두루두루 봐야지. 그래서 초식동물은 아무리 큰 동물이라도 눈이 백미러처럼 붙어 있는 거야. 도망가는 놈은 좌우, 전방, 후방 360도로 보지.


8) 용서받을 사람

 나는 용서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 나는 용서받을 사람이지 용서해줄 사람이 아니야. 백번 생각해도 다르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고, 저 사람이 나를 용서해야지... 무슨 말인 줄 알겠나? 나는 말이네, 용서받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짓는 일이라네.


9) Enemy vs Rival

 에너미(Enemy)는 안 돼. 라이벌(rival)이어야지. 라이벌의 어원이 리버(rival)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그런데도 같은 물을 먹잖아. 그 물이 마르고 독이 있으면 동네 사람이 다 죽으니, 미워도 협력을 해. 에너미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지만,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어.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하지. 같이 있는 거야. 그게 디지로그 정신이야. 기업도 마찬가지라네.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는 에너미가 아니라 라이벌이야. 큰 조직은 작은 조직의 모험 정신을,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의 시스템을 배우며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해야 해.


10) 사기꾼 vs 사잇꾼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

 

[책장을 덮으며]

 죽음을 앞둔 이어령 작가님의 한 마디가 내 귓가를 울렸습니다.

"죽음이라는 건 없어지라고 있는 거야. 사라져 버리는 게 최고지."

초월적인 모습으로 삶을 대하는 이어령 작가님의 모습에서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령 작가님은 세상의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 생각이 됩니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었고, 관찰했기 때문에 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 대립하고 다투는 현대 사회에, 이어령 작가님이 남겨주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모습'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이어령 작가님은 별세하셨지만, 그 가르침은 오랫동안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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