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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Oct 10. 2022

쉬운 부하. 쉬운 팀장.

쉬운 부하는 싫었지만, 쉬운 팀장은 되고 싶다.

11시 55분.

오전 내내 부장님의 몸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의자 등받이가 제자리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의자가 마치 "아이고~ 허리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오늘 점심 뭐냐?"라는 부장님의 질문에,

"네, 오늘 점심은 제육볶음입니다."라고 준비한 멘트를 꺼낸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침에 출근하면, 항상 구내식당 메뉴부터 숙지를 했다.)


"그래? 그럼 식사하러 가볼까?"

대리님께서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 하신다.

나는 최대한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서.


"상사의 마음을 얻으려는 급한 마음에 엘리베이터부터 누르고 달려가기 시작하면, "그 친구, 몸 한번 빠르네"라는 칭찬으로 시작해서, "그 녀석은 머리보다 몸 쓰는 일 시켜야지"로 결론 난다.
- 직장인의 감정수업 _ 이주희 지음 _ RHK코리아 출판사 - 


점심시간에는 각 부장님들의 성향에 따라 팀원들의 점심시간이 좌우되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옆 팀장님은 항상 계단을 이용해 구내식당으로 이동하셨고,

(물론 팀원들도 반강제적으로 계단 오르기 운동을 했다.)


절대 운동을 하지 않는 우리 부장님께서는 항상 엘리베이터를 타셨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눌러놓는 것은 항상 내 차지였다.

타이밍이 딱 맞게 엘리베이터가 올 때에는 칭찬을 받았지만,

(이게 칭찬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간신히 놓쳐서 다들 뻘쭘하게 층수 표지판을 보고 있을 때에는,

대리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보통 이럴 때에는 엘리베이터도 아주 늦게 오곤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문제다.

저층부에 위치한 우리 팀은 고층부 구내식당까지 가면서 층층마다 서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는 했는데, 보통은 막내인 내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있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 직원들의 원망 어린 눈빛은 나의 몫이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도 문제다.

그래도 부장님, 과차장님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시더라도 정원초과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면, 계단으로 구내식당을 가야 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전에 구내식당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걸어서 계단으로 올라갔더니, 먼저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시던 부장님께서 친절하게도(?) 이리 와서 같이 먹자고 하신 것이다. 그분들은 이미 거의 식사를 마치고 계신 상태였는데...

지금이야 "저는 따로 먹겠습니다."가 가능할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밥을 따로 먹겠다는 것은 '이제 당신과 겸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군대 유격장 시절 이후 처음으로 밥을 쓸어 담듯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면, 엘리베이터보다 빨리 구내식당이 있는 고층부에 도착해야 했다. 먼저 도착하면 "어우~ 책인사씨 운동 잘하네~"라는 칭찬(?)을, 도착하지 못하면 "왜? 따로 먹으려고?"라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팀장이 되면, 점심시간만큼은 직원들이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혹시라도 그날 구내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외부 식당에서 밥을 먹자고 할 경우에도 세상 쿨하게 점심을 사주겠다고. 


팀원은 2명뿐이고, 재택근무로 출근 일자가 겹치는 날도 많지는 않다.

혹시라도 같은 날 출근해서 식사를 하더라도 팀원들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해 주고,

팀원들이 내 눈치를 보지 않고 각자 편하게 식사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다른 팀의 팀원들도 팀장들끼리 따로 식사를 하러 가기를 바라는 눈치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혹시라도 끼워주면 같이 먹고,

외부 식당이라면 세상 쿨하게 계산도 해주고(='호구가 되어주고'라고도 볼 수 있다),

점심 먹고 나면 커피를 사주고, 바로 자리를 비켜준다.

(빨리 팀장들 뒷담화도 해야, 스트레스도 풀릴 테니 말이다.)




신입사원 시절의 나는 '쉬운 부하'였다.

구내식당 메뉴를 외우고 있어야 하고, 

먼저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잡아야 하는 쉬운 부하.


팀장이 된 지금의 나는 다시 한번 '쉬운 팀장'을 꿈꾼다. 

하루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커피든, 퇴근 이후 누군가 사줬으면 하는 가벼운 호프 한 잔이든,

항상 웃으면서 계산을 해주는 쉬운 팀장.


그간의 노력을 직원들도 이해했기 때문일까?

단 2명뿐인 팀원이지만, 나한테 쉽게 찾아와 의견을 말하는 팀원들을 보면서

'쉬운 팀장'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쉬운 부하'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쉬운 팀장'이 된 지금에 만족한다.

나는 '쉬운 팀장'이다.

[무한도전 _ 무한상사 야유회 편 _ 나는 몇 점짜리 팀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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